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임나일본부설과 가야 == [[가야]]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남조선경영론)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 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 지역 [[시민구단]]인 [[경남 FC]]의 엠블럼에도 등장한다.]가 발굴된 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파형동기들보다도 더 크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57381|#]] 그래서인지 2011년 현재까지 고대 일본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때문에 아래 각 지역에 대한 소개에도 이전의 학설과 현재 학설이 뒤엉겨 있다. 어느쪽이 옳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곤란한 관계로 약간의 추가는 하지만 삭제는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금관국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5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되는 유물까지 나왔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9170|금관국 유적인데, 5세기 후반부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어느 쪽이든 일본의 왜국이 임나일본부설의 주장따나 가야를 직접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는 백제가 가야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고,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왜가 그 기록을 차용해서 관계를 뒤집어 《[[일본서기]]》를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4세기 [[근초고왕]]의 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라는 장군이 나온다. 이 때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목라근자 기록에서 보이는 남가라는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변진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던 금관국이 가라라는 이름을 [[대가야]]에 넘겨주고 남가라로 통칭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후대의 관념이 부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중국]]은 이에 대해서 백제를 중심으로 가까운 [[고령]]을 가라로, 먼 [[김해]]를 남가라로 생각하는 관점이 반영되었다고 설명하지만, 후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노중국 (2006), 4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관계.]. 왜국이 이것을 자신들의 기록으로 편입하여 [[진구황후]]의 기록으로 바꿨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진구황후는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가 차이나는 것은 고질적인 [[이주갑인상]] 문제다. 보통 가야(및 백제-신라 등지)에서 건너가서 일본에 자리잡은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이랑 가야인들의 제휴,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 및 일본의 가야 외교부 내지는 가야랑 일본이 문화-군사력을 서로 주고받은 전형적인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잘해봐야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이 가야 지방에 일시적, 부분적으로 끼쳤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성왕(백제)|성왕]]의 가야에 대한 재건 의지를 보면 6세기경 가야는 친백제계 지역이었고, 고구려에게 박살난 가야를 수습하여 신라에 연합하여 대항하려던 정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국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게 된다. 다만 왜국이 가야와 친밀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가야에서 건너간 유물이 많이 나오며, 인적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라는 정체불명의 기관은 같은 세력권이었던 가야와 왜국이 서로 혹은 백제랑 연락하기 위한 외교창구 정도에 그쳤으리라 추정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기에서 성왕과 왜국의 관계를 거꾸로 기술하여 일본의 종주권을 강조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다.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나 이름 자체는 가야의 별칭으로 쓰여졌으나 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의 역사적 용어가 급속히 부정적인 의미로 전락했다. [[하치만]](八幡大菩薩: 팔번대보살)이 가야를 침공했다는 이야기는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