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 ===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王陵碑)』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399년에 왜군이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왜군의 거점이 임나가라의 종발성인것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은 후대 일본에 의한 과장이나 왜의 언론플레이를 통한 윤색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낮기에 큰 논란이 되어 왔으나,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로 일단 일본의 주장은 지적받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신묘년조는 관용적으로 신묘년(391년, 영락 1년)조라고 불릴 뿐, 정확하게 말하면 병신년(396년, 영락 6년)조의 일부분이다. 호태왕비에는 호태왕의 치적에 대한 기사는 을미년(395년, 영락 5년)조의 비려 정벌에서 시작하며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조는 없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신묘년조'는 을미년조와 병신년조 사이에 끼었고, 문맥상 을미년의 비려 정벌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병신년조에 붙는 것으로 본다. 병신년에 호태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묘년(391년)의 일을 언급했다고 하면 문맥상 연속성이 있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고로 395년에 거란의 일족인 패려를 공격한 일과 신묘년 이래로 서술되는 문장은 결이 다르며, 신묘년과 병시년의 기사는 일맥상통하는 기사들 임을 알수 있다. [* 별개의 내용이라면 연대 순서대로 391년-395년-396년순으로 서술 되어야 하지만, 395년의 거란의 일족인 패려를 토벌한 기록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391년으로 되 돌아와 신묘년의 391년 396년.. 404년 순서대로 서사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다. >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기존의 번역) 신묘년조의 해석은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다. 일본인 학자들이 최초로 한 해석에서도 해독하기 어려운 세 개의 글자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신(新), 라(羅), 가(加)[* 훼손된 부분을 '伽倻新가야신'으로 보고 이어서 '百殘伽倻新羅백잔가야신라'라고 볼 수도 있다.] 가 들어간다고 보고 "백잔, 신라, 가라[* 가야(伽倻)•가락(駕洛)의 다른 이름]를 파해서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백잔, 임나, 신라를 파해서"로 보거나 해독되지 않는 부분에 동사가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해서"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도쿄대 사학과 교수인 다케다 유키오 또한 신라 앞에 파손된 문자를 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중국인 연구자 왕건군이 그곳에서 탁본업을 하던 초균덕 부자에게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이 오물이 발라져 불태워져 훼손 되기전에 필사했다는 필사본 내용과도 동일하다. 덧붙여 다케다 유키오[* 석회가 발라지기전의 탁본 여러개를 집중 연구했다]는 그렇게 주장하는 바를 북한학자 손영종의 학설과 같이하고 있다. 아래 첨부된 사진은 김진명이 주장하는 왕건군의 연구 서적에서 발견 되었다는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이며 초기에는 진위 논란이 있었지만 [* 김진명이 유사사학을 주장하는 괴랄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설은 이덕일 일당들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사진의 출처는 김진명의 소설이며 정확한 진위는 알수가 없다. 왕건군의 어느 서적에서 가져왔는지도 찾을수 없다 (--찜찜--)] 일본학자들도 東[*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제1권 고대사 부문에서 이 학설을 채택하고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이라고 판독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근거는 튼튼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다케다 유키오 또한 다른 일본사학자들과 다르지 않게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는 학자로, 왜가 백제를 도해파 하여, 동쪽에서는 신라를 ○ 했다라고 해석한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 의하면, 초씨 부자에게 만들어진 저본은 원래 이끼를 제거 하기위해 광개토대왕릉비에 동물의 분면을 바르고 불지르기 전에 훼손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들이 보이는 대로 필사 했다고 밝혔다. 이 저본은 초씨가 죽고 조카 딸에게 맡겨졌으며 왕건군은 저서를 발간할때 부록으로 첨부한 모양이다. 이것을 발견한 김진명이 왕건군의 저서를 갖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교수 다케다 유키오를 방문하고 다케다 유키오는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후로 東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진위는..(?). 이것은 김진명의 일방적인 주장이므로 100% 신뢰할수 없지만, 다만 선술했듯이 다케다 유키오가 東으로 판독하고 있는것은 맞다. 안동대 임세권 교수가 발간한 논문에서도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 보통 자신이 본 문자를 자의적으로 판독하여 해석하는 것을 석문이라고 하지만, 논문에 언급 되어 있다 싶이, 초천부 초균덕 부자는 고문서에 일가견이 없는 소시민으로, 자신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낮다고 판단하여,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을 언급하며 東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밝혔다.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참고된 논문 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은 1997년에 발간한 논문으로, 김진명이 최초 소설에서 첨부한 사진은 1995년에 출판된 가즈오의 나라라는 책이므로 임세권 교수가 이것을 보고 논문을 집필 했을수도 있으므로 김진명이 첨부한 사진의 진위여부를 판단해줄수 있는 자료는 아니다. 논문 273,274쪽 참고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60&fileName=kn_074_0060.pdf]] 단순히 초천주 초균덕 부자의 수초본에 東 자가 있다더라에 입각한 결자 예측이 아니라, 실제로 東의 7,8획에 해당하는 사선과 日자의 형태를 근거로 東나 更로 판독하고 있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임세권 교수의 논문 274쪽에 첨부된 내용인데 白崎昭一郞는 훼손된 비석의 탁본을 보고 백잔의 다음 결자는 更로 추정했다. 일본측에서는 更討新羅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菅・三宅을 비롯하여[* https://www.i-repository.net/contents/outemon/ir/301/301811209.pdf#search='%E6%9B%B4%E8%A8%8E%E3%80%8C%E8%BE%9B%E5%8D%AF%E5%B9%B4%E3%80%8D+%E6%9D%B1+%E6%B8%A1+%E6%AC%A0%E5%AD%97] 더럿 있는데 내용은 신라를 같이 치다라고 해석할수 있다. 백제와 연합하여 친것이거나 백제를 치는김에 신라를 쳤다라고 해석할수 있다. 공교롭게도 更와 東는 외관상 비슷하다. 이것이 릉비가 훼손되기 전의 탁본을 기초로 한 해석이라면 두 글자는 매우 흡사 하기 때문에 두 글자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의 토론에서도 일본측 사학자로 참여한 하마다 고사쿠도 일본사학계의 최근 트렌드는 백제의 다음 결자는 東으로 읽는 것이다라고 발언한바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582쪽 참고. 일본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마다 고사쿠가 발언 하였다. >왜가 백제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가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가 하필 본국에서 먼 백제를 왜 먼저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지 동선상으로는 납득이 안된다. 이를두고 한국측 사학자들 중에서는 고구려 주체설의 근거로 보고, 고구려가 백제를 (수군으로) 도해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보호) 삼았다라고 해석한다. [[파일:초균덕 부자의 석문(필사본).jpg]] 한때 『[[광개토대왕릉비]]』 조작설이 화제가 되었지만 중국 학자 왕건군의 연구 이후 조작은 없었다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탁본시 더 잘 되도록 석회를 바르기는 했지만 글자를 석회로 덮어 변조하지는 않았으며, 지워진 글자는 풍화작용과 비문 발견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붙여 태울 때 떨어지고 훼손된 것이라고 한다. 신묘년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 중국, 일본의 학계에서 이런저런 다른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유명한 해석 중 하나는 정인보의 설로 신묘년조의 재해석 중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온 설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부분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고구려인 것은 당연하므로 생략되었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 ○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정도가 된다. 위키백과에는 이 설이 정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근거로 삼을만한 글이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 고구려의 수군(水軍)을 이용했으므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격파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