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개요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나일본부설_지도2.png|width=100%]]}}}|| ||<-2> {{{#000000,#fff '''임나일본부설의 실존 여부에 대한 관점'''}}} || ||<:> {{{#000000 '''A'''}}}||[[진구 황후]]가 [[백제]]를 속국으로 두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주장([[삼한정벌]]).[br]《일본서기》 내 [[신화]]적 변작으로, 현대엔 아예 인정되지 않음. || ||<:> {{{#000000 '''B'''}}}||[[일본]]계 세력이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br][[일본어 위키백과]] 및 일본 내 일부 [[교과서]]에서 채용.[* 물론 위키백과는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은 유의. 애초에 일본 내에서도 [[http://www.y-history.net/appendix/wh0301-084_1.html|세계사의 창 가야 항목]]처럼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글들은 보인다.] [br]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간주, 시정을 촉구하고 있음. || ||<:> {{{#000000 '''C'''}}}||옛 [[침미다례]] 및 [[가야]] [[안라국]](아라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부 또는 일본계 세력이 존재했다는 주장.[* 일제강점기 식민사관학자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임나 4현을 현재의 전라도 일대로 비정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일본 내 일부 교과서는 일본서기상 서술을 그대로 해석하여 '일본이 임나4현을 다스리고 있었으나 후일 백제에게 양도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br]일본 내 일부 교과서에서 채용.[br]일본의 역사왜곡으로 간주되고 있음.[* 광주광역시에서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면서 재조명된 적이 있으나, 논란이 있다. 하술 '3.11. 주구묘와 장고형 무덤' 단락 참조.] || ||<:> {{{#000000 '''D'''}}}||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안라국 등이 일본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주장.|| ||<:> {{{#000000 '''E'''}}}||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일본계 또는 왜구의 제한적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 ||<:> {{{#000000 '''F'''}}}||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대마도의 세력을 지칭했을 것이라는 주장.|| ||<:> {{{#000000 '''G'''}}}||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일본서기》, 《고사기》 기록은 당시의 외교나 전쟁[*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내용은 신라 구원과 관련하여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 혹은 해석 오류라는 설. 일제의 비문 조작이라는 설도 과거엔 거론되었으나 요즘은 많이 잠잠해진 편이다. 《삼국사기》의 왜군 관련 기록은 단기간의 침략으로 본다.] 등을 후세에 과장・변작한 결과라는 주장.|| 임나(가야[* [[임나]]는 [[가야]] 지역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가야로 불러서 임나라는 이름은 생소하고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거부감까지 가지는 편이지만, 일본 기록에서도 등장할 뿐 한국 측 사료에서도 임나라는 이름은 종종 쓰였으므로 '임나'라는 단어 자체는 본질적으로 일본부의 존재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를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야]] 문서 참조.])일본부 존재설([ruby(任那日本府説, ruby=みまなにほんふせつ)])은 [[일본]]의 [[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6세기 중엽 사이에 [[야마토|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으며 이 지역을 속국, 제후국(번국) 또는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에서는 '''남조선경영론(南朝鮮經營論)'''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기 [[삼한정벌]] 이래로[* 물론 신공황후기는 이주갑인상이라는 괴랄한 논리로 4세기로 끌어내려야 한다.][* 일본이 마치 상국인양 서술하는 윤색은 백제가 일본과 통교하기 전부터 나타난다.]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임나의 일부[* 후술할 임나 10개국도 일본에서 주장하는 자신들이 통치했다는 왜국의 강역이다. 그러나 안라, 다라, 탁순, 탁국, 남가라, 비자발, 침미다례의 7개국은 [[근초고왕]]의 가야 원정 때 일본이 그들을 섬멸하고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었다.]인 임나4현 즉, 하다리[* 下哆唎 전남 여수로 추정 ], 상다리[* 上哆唎 역시 여수로 추정], 사타[* 裟陀 전남 구례군 혹은 순천으로 추정], 모루[* 牟婁 영광 광양 고창 무안]를 6세기 초반까지 소유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다가 512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국의 임나4현을 요구 했고 왜왕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케이타이 덴노|계체]] 6년(512) 12월 기사 참조.] 이듬해 513년에는 대가야가 백제의 기문과 대사라는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데 대가야에게 빼앗기자, 왜왕에게 사신을 보내 되돌려 달라고 부탁하고, 왜왕이 재차 조칙을 내려 대가야의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에게 할양하게 했다.[* 원래 백제의 영토인데, 어째서 백제가 왜왕에게 부탁해서 돌려달라고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임나일본부설은 단지 그들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통치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백제, 신라마저도 마치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마음껏 전횡을 부렸던 것처럼 서술하는데, 이에 대한 일례로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을 무례하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백제인들이 스스로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일본서기 397년 응신 8년조의 기사에는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정복한 [[침미다례]] 및 현남[* 峴南], 지침[* 支侵], 곡나[* 谷那], 동한 [* 東韓]의 땅을 [[아신왕]]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아신왕은 당황하여 태자 직지(후의 전지왕)를 파견하여 선왕의 우호를 잇게 하였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일본서기에는 분명하게 당대의 서적 백제기를 인용하며 인질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파견했다고 기록 되어있지만, 정작 [[삼국사기]]에서는 인질이라고 나온다.][* 백제의 영토를 빼앗았다는 해석도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도망간 뒤, 왜 조정에게 잘 보이려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왜국에게 빼앗겼다는 식으로 윤색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지침은 홍성이나 충남 예산으로 비정, 동한은 충북의 괴산이나 음성 일대로 추정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빼앗았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지만, 같이 언급 되는 침미다례는 전남 일대, 곡나는 전라도 곡성 혹은 충주, 현남은 전북 익산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냐는 해석이 있다. 물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의 치세시기인 400년에 고구려군이 부산/김해 일대까지 가야와 왜군을 추격해 내려왔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호남 일대까지 도달 했다는 정황은 없다.] 다만 東韓은 아신왕이 죽고 왜국에 체류하던 [[전지왕]]을 백제로 송환하여 즉위하는 과정에서 왜국이 백제에게 빼앗은 땅의 일부인 동한을 다시 백제에게 주었다고 나온다. 또 458년에는 지진원(池津媛)이라는 백제 여인이[* 428년(일본서기 상으로는 308년의 기사이나 이주갑인상을 고려)에 파견 되었다는 전지왕의 누이 新齊都媛과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이 기사를 기점으로 이주갑인상의 왜곡은 사라지고 정상적인 년도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묘하게 맞물려서 비유왕의 치세기는 전부 소거 당했다.] 왜왕의 신하와 정을 통하였다가 발각되어 화형에 쳐해지고, 이에 놀란 [[개로왕]]은 동생인 [[부여곤지]]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했다.[* 부여곤지와 개로왕의 첩을 일본에 보내는 도중에 첩은 개로왕의 아들 [[무령왕]]을 출산하게 되고, 무령왕은 곧바로 백제로 송환되지만, 부여곤지는 일본에 머물렀다.] 즉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에 걸쳐 고구려의 남하와 맞물려 왜국 자신들이 백제와 신라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인 점을 부각시켜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왜왕과 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포장하기 위해 왜국이 뺏었다고 거짓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특기할 점은, 근초고왕 치세기와 맞물려 시작된 이주갑인상의 연도 조작은, 백제가 일본서기에서 장수왕에 의해 정벌해 사라졌다라고 전하는[* 장수왕이 백제를 정벌해 없앴다고 기록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장수왕 휘하의 장군들이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자고 제언했지만, 장수왕은 백제는 일본을 섬기는 관가이므로 멸망시킬수 없다고 말하고선 정벌을 멈추었다.]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라진다. 직후에 등장하는 기사는 개로왕이 장수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멸망 했다고 이른다. 그 소식을 들은 왜왕은 문주왕에게 고마나리(웅진)[* 일본서기에선 고마나리는 임나국의 읍이라고 전한다. 충청도 일대도 자신들의 영유지 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을 주어 백제를 재건하게 한다.[* 웅략 21년 (477년) 3월 기사 참조.] 그러다가 일본서기에 이르면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수복한 것은 6세기 중반으로 주장하는데 백제 성왕이 가야계 왜인들의 안라왜신관[* 일본서기 사비회의 목록을 참고하자. [[흠명천황|흠명]] 5년(544)]을 내쫒고 551년[* [[흠명천황|흠명]] 11년]에는 성왕이 직접 가야군을 이끌고 신라와 연합해 한성을 수복하고 남평양[* 원문에서는 평양 일대라고 적었는데, 평양 일대가 아니다. 한강 이남의 지역을 남평양으로 추정한다] 일대의 6군을 점령한 기록이 존재한다. [[이주갑인상]]에 대해 특기할만한 점도 일본 국내의 사정을 다룬 기사에서는 이주갑인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반도 관련 기사, 특히 백제에 관련한 기사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5세기 중반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이때 멸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주갑인상은 사라진다. 이를 두고 김현구는 백제가 망해서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8대 성씨중 한개인 목씨가 이룩한 일들을 소급적용 해서 자신들이 통치 했던 것처럼 윤색 했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서기에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백제에서 전횡을 일삼자 왜왕이 소환 (일본서기 414년, 광개토왕이 막 승하 했을 시기이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大倭의 목만치라고 기록하며, 마치 왜국의 신하 인것처럼 소급해서 전하고 있다.[* 실제로 목만치등 목씨 일가들이 도왜한 시기는 일본서기에서 이르길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한 5세기 중반 쯤이다.] 백제에서 건너간 이들 세력들에 의해 마치 왜국이 백제의 상전인 것처럼 기록 해놓고, 백제의 역사와 비교하고 나니, 자신들이 우위인것처럼 기록 했지만 정작 당대 백제의 기록에 비해 초라함과 한미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 이전 기록을 윤색해서 120년을 끌어 올린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당대에 문자가 없어서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으로써는 120년을 끌어올렸으니 당연히 그 120년의 공백에 백제삼서를 인용하며 끼워 넣을수 밖에 없었다. 백제가 가야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가야 연맹국들에게 리더쉽을 회복 한것은 [[사비회의]] 이후 부터이다. 이 후엔 백제 성왕이 백제/가야 연합군과 신라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서 다시 빼앗아 온다.[* 그 이전에는 나름대로 가야가 백제에 저항하기도 하고 성왕의 명령을 어기는 등 다소 백제왕의 패권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해왔지만 사비회의를 직후로 가야는 백제가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6세기 중엽에 일본의 가야 패권은 소멸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일본이 가야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잃은 것은 562년에 벌어진 신라와 백제 왜 연합군 사이에 가야를 두고 씨운 전쟁이다. 이때부터 가야는 근초고왕 이래로 200여년 간의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라에게 완전히 복속된다. 자세한 내용은 [[가야멸망전]]을 참고하자.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의 정의는 일관되게 가야의 통칭 즉, 전라남도 일대와 경상남도 일대 (김해 + 부산) 처럼 묘사되지만[* 아마 일본 측에서 임나 = 가야의 통칭으로 당대에 오해한 모양이다. 이게 와전되어 고착되었고 일본서기에서 그렇게 부르니 편의상 임나 = 가야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임나는 가야의 일부이다. 당대에 작성된 광개토왕비를 봐도 어느 쪽이 더 정확한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는 임나와 가야를 합쳐서 부르고 있는 용례가 있으며, 임나가야는 부산 김해 일대의 가야 연합체의 일부로 불리고 있어서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 문서를 참조. 간혹 국내 사서에서 임나라고 단독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일관되게 [[금관가야]]를 지칭한다. 후술할 내용이지만 임나와 가야를 같이 병기하며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는 용례는 송나라에서 왜왕에게 하사한 육국제군사의 직위 밖에 없다. 임나 혹은 가야를 따로 언급하며 혼용하는 경우나 임나와 가야를 같이 병기하고 같은 국가 취급하며, 부산, 김해 일대의 금관가야[* 참고로 중국에서는 구야한국이라고 불렀다.]를 칭하는 용례는 있어도... 가라에 대한 명칭에 대해도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일본어로 가라는 한국의 韓을 뜻한다. 일본어에서 한국의 韓은 가야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임나가야에서 임나의 접미어의 가야는 고대 韓語로 나라라고 해석된다. 즉 임나가야는 임나국 (예를 들어 한+국 = 한국, 미+국 = 미국)[* 중국이 금관가야를 부른 명칭 구야한국에서도 구야는 금관에 대응하고 한국은 가야에 대응하는 단어기 때문이다.]의 개념이고 가야는 일본어로는 韓이라는 뜻이고 고대 한국어로는 나라라는 뜻이다. 선술한 바와 같이 일본서기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다 수용한다면 경상남도 전역에 걸친 가야 10개국의 강역은 물론이요 전라남도 일대 전역[* 임나4현 下哆唎 =전남 여수, 裟陀= 순천, 牟婁 = 영광, 광양, 고창, 무안과 谷那 = 전남 곡성]과 전라북도 일대[* 峴南=익산]와 충남 일대[* 支侵 = 충남 홍성 혹은 예산, 또 장수왕에게 백제 개로왕이 죽고 즉위한 문주왕에게 백제를 재건하라며 고마나리 = 웅진을 백제에게 할양했다고 묘사했다], 충북 일대[* 東韓 = 괴산,진천,음성]를 걸친 백제 강역의 대부분과 중복되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가야연합 10개국 + 침미다례 + 임나4현을 통합한 강역과 비슷하다. 가야 연합은 전남과 경남 일대 침미다례는 전라남도 일대이고 임나4현은 충청북도 근방으로 추정된다] 첨부되어 있는 사진의 B에 해당하는 강역이다. 즉, 일본이 말하는 임나는 가야 연맹체 10국과 선술된 임나4현과, 이밖에 일본서기에서 '임나'라고 불리는 국가들의 통합된 강역이다. 이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술에 대한 일본어 위키백과의 설명은 이렇다. > 三書の中で最も記録性に富むのは『百済本記』で、それに基づいた『継体紀』、『欽明紀』の記述には、「日本の天皇が朝鮮半島に広大な領土を有っていた」としなければ意味不通になる文章が非常に多く[75]、また、任那日本府に関する記述(「百済本記に云はく、安羅を以て父とし、日本府を以て本とす」)もその中に表れている。 > > 삼서 중에서 가장 기록성이 풍부한 것은 『백제본기』로서 이를 토대로 한 『계체기』와 『흠명기』의 기술에는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다」고 하지 않으면 의미불통이 되는 문장이 매우 많았으며[75], 또한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술(『백제본기』에는 임나가 안라를 부(父)로, 일본부를 본(本)으로 여긴다고 한다.[* 무릇 임나는 안라를 형(兄)으로 여기고 오로지 그 뜻을 따릅니다. 안라인은 일본부를 하늘처럼 여기고 오직 그 뜻을 따릅니다.][* 夫任那者, 以安羅爲兄. 唯從其意. 安羅人者, 以日本府爲天. 唯從其意][* 흠명5년 (544년)3월 참고]」)도 그 속에 나타나 있다. > 天皇が百済王に「賜」わったという地は、忠清道の洪城、維鳩、公州付近から全羅道の栄山江、蟾津江流域にまで及んでいる。これは、滅亡時の百済王が独立して、かつ正当に統治していた国家の領土とほぼ一致する。しかし、7、8世紀の交の在日百済王族、貴族はそれを天皇から委任された統治と表現せざるを得ない臣下の立場にあった。このような観念を実体化して、「高麗、百済、新羅、任那」は「海表の蕃屏として」「元より賜はれる封の限」をもつ「官家を置ける国」だった(『継体紀』)などというのは信頼し難い > > 천황이 백제왕에게 하사했다는 땅은 충청도의 홍성,維鳩[* 유구.],공주 부근에서 전라도 영산강, 섬진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는 백제가 멸망했을때 까지 백제왕이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국토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7-8세기에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귀족들은 천황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했다고 표현할수 밖에 없는 신하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관념을 실체화하여, '고려, 백제, 신라, 임나'는 '海表'[* 해표 : 해외를 뜻한다. 어느곳에서는 한반도를 특정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의 번병[* 번국 내지는 속국] '원래 내려진 봉한'을 가진 '관가 [* 官家: 천황의 직할령]를 둘 수 있는 나라'였다(『계체기』)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가라국([[금관가야]])을 포함해서 10국이 있다고 쓰여 있다. 가라, 안라, 사이기, 다라, 졸마, 고차, 자타, 산반하, 걸손, 임례 10개국과 임나4현이[* 下哆唎,上哆唎,裟陀,牟婁] 일본에서 말하는 자신들이 통치했다던 강역이다. 이 10개국[*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로라고 불리는 임나4현을 제외한 10개국] 중 예를 들어 합천 다라리에 다라국의 고수준 제철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다라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서기는 비록 해외 기록이지만 한국 측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삼국시대로부터 수백년 뒤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과 달리 좀 더 앞선 8세기에 편찬된 기록이므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가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국내 기록보다 정확한 부분이 일부 있다고 확인되었지만[* 《[[삼국유사]]》가 인용한 《[[가락국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6국의 가야가 있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한반도와 관련된 기사는 모두 일본이 상전인 것처럼 조금씩 바꿔 써 놓은 게 《[[일본서기]]》의 특징이고, 이런 일본서기의 과장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다른 사료를 여기에 짜맞춘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일제시대 이래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고, 현대 사학, 고고학이 발달하며 이를 부정하는 근거가 모인 끝에 '일본부의 존재' 가설은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폐기'''되었으나, 마치 한반도 남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일본 내 역사 교과서에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로 인하여 다시 고개를 슬금슬금 들고 있는 상황.[* 세계의 교과서들도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여과 없이 수용하여 지도에 표기하고 있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055876|"영어 역사서의 지도 27% 한국 표기 오류"]]). 이뿐만 아니라 일부 사이트에도 여전히 명기되어 있다.]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좌담회 부분에서 비판 받았던 내용인데, 일본측에서도 상기된 내용들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라는걸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개괄적으로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측 김태식 교수와 김현구 교수 등은 일본에서 사료비판 없이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는 내용등을 마구 적으며, 옛 사람들이 쓴 기사니깐 기사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라는 식의 방관하며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 원문만 번역하여 개설서에 수록하며 일반인으로 하여금 현혹 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서술 방법을 지적했다.[[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k.pdf]] 물론 학계에서 헛소리 취급 받는 것은 상단의 A, B, C와 같은 막나가는 주장 쪽이고, 그와는 별개로 일부 지역이 일본계 군사세력에게 [[신라-왜 전쟁|공격받은 사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백제의 사주를 받아 왜군이 신라나 대방([[황해도]])을 공격한 것이 나왔다.]는 실제 있었던 일의 예시로 들 수 있다. 일본서기의 문제가 되는 기록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 책에서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일본부' 기록의 원형이 된 어떤 왜인 위주의 기관이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데는 현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관의 성격은 '통치기구'가 아니라 ‘백제-가야의 여러 나라-신라-왜국’이란 고대의 국제 다자구도에서 일종의 교섭 용도, 그것도 왜왕과 왜국 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일본서기의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봐도, 이 '일본부' 소속 왜인들(이나사, 마도 등) 마치 가야의 [[안라국]]에 매수당한 것처럼 안라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백제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왜국에 따지자 왜국은 우리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식으로 나온다. 왜국 중앙정부가 통제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기관이라면 당연히 이런 걸 통치기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것으로 등장한다. 이 문서의 아래 단락에서 나오는 여러 근거와 논박은 고전적인 [[식민지]]적 경영론을 논파하고 반박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무조건 한반도에 대해 왜곡된 기록만 실린 것은 아니다. 백제 멸망 후 멀지 않은 시점에 편찬되었고[* 한국의 [[삼국사기]]는 백제가 멸망하고도 500년 이상 지난 뒤에 편찬되었다. 그동안 남아있었을 백제계 문헌기록은 백제인이 저술한 원형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며 변형되거나 실전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한국계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는 백제삼서([[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대거 인용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백제인이였던 왕인이 왜국에 문물을 전해줬다는 글도 쓰여 있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가장 먼저 강림한 곳이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기록. 그리고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토와 가야 왕자 쓰누가 아라시토를 보면 한반도인들이 왜국 열도에 정착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야요이의 묘지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증명도 있다.[* 물론 옹관묘는 왜 열도에서 100년 정도 빨리 등장한다. 하지만 옹관묘 자체가 만들기 쉬운 묘제로서 한반도에서 자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 특유의 자주성과 선민의식이 강화되면서 왕실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서기의 왜곡된 부분을 그대로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위험하며, [[교차검증]]을 통해 과장을 걷어낸 기록의 원형을 추출하기 위해 한일 사학계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1. 왜의 통일 시기는 언제인가? 2.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 있는 왜의 실체 (지방 분국들의 구전) 3. 왜왕 武는 [[유랴쿠 천황]]인가? 4. 가야와 일본의 관계 등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