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경업 (문단 편집) ==== 조청 연합 작전에 태업 ==== 청나라는 병자호란 후 조선과 군신 관계가 되자 대명 작전에 조선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난색을 표했으나, 청나라에게 밉보이면 더욱 큰 곤혹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병을 보냈다. 이런 작전에서 자주 [[조선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계속 청나라에 [[태업]]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1637년 청은 [[모문룡]]이 죽은 후에도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동강진을 토벌하기 위한 병력 요청을 했다. 임경업은 수군장으로 참전하지만 그가 지휘하는 조선군은 처음에 공세헤 소극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정벌군을 총 지휘한 [[마푸타]]가 경고하자 그제서야 조선군은 공세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조청 연합군은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만명의 명군을 죽이고, 명군의 지휘관인 심세괴를 사로잡았다.[* 일부 역덕들은 임경업이 심세괴에게 미리 통고해서 명군의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심세괴가 사로잡히고 명군 만명은 몰살당했으며, 이로서 가도는 온전히 조선의 영토로 수복되었으니 (<[[조선왕조실록]]> [[인조]] 16년 7월 12일 계유 1번째 기사)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심세괴와 내통을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가도에 주둔하던 명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기는 커녕 전멸했다.] 마푸타는 심세괴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여 참해진다. 다시 의주로 돌아온 임경업은 의주의 물자가 불안해져서 방어가 어렵자 이번에도 심양에 상인들을 파견하여 밀무역을 시도하였다가 청에 발각되었고, 이를 전해들은 인조의 분노를 사서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된다. 1638년 청군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병자호란 시기 항복 조건에 병력 파견이 있었으므로 다시 병력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 때 비변사에서는 유배를 가있던 임경업을 용서하여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전투를 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에게 말 1필을 받고 의주 부윤을 거쳐서 평안 병사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