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경업 (문단 편집) === [[병자호란]] === 병자년 정월, 임경업은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의주로 돌아온 이후 청나라의 침공이 임박한 것을 감지하고 2만 병력을 내려줄 것을 [[비변사]]에 건의했지만, 비변사는 오히려 의주에 배치되어 있던 1,600명의 부방(赴防)[* [[조선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 지대에 파견되어 방위 임무를 맡은 일. - 출처: 두산백과] 병력을 안주로 이동시켜 청천강에서 저지선을 구축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나마 도원수 [[김자점]]이 의주를 지키려는 임경업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고, 그의 지원에 힘입어 기존의 부방군이 안주로 이동하는 대신 황해도의 부방군 2,400명이 의주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이로써 당시 임경업이 거느린 병력은 의주의 장정 2,300명과 황해도 부방군 2,400명 그리고 기타 의주부 직속 아병(牙兵)과 인근 진보의 병력을 합쳐 5,000명에 달했다. 이제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지키는 데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 휘하에 고작 300 ~ 400명 밖에 없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치계하였다. >"겨울 방비가 임박하여 산성의 수비가 매우 긴급합니다. 백마산성은 성첩이 847개이니, 성첩당 다섯 명으로 계산하면 4,235명이 되는데, 4영(營)의 유격부대 각 100명과 중영(中營)의 유격부대 200명을 합치면 총 4,835명이 됩니다. (후략)" >---- >인조실록 - 무인년(1634) 9월 25일 >김자점이 아뢰었다. >"임경업의 뜻은 올해 안에 백성들을 의주의 옛 성으로 들여보냈으면 하는데, 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백마성으로 들어갔다가 완실(完實)해지기를 기다린 연후에 들어가서 지키고자 합니다. 지금 백마성으로 들어간 자가 1,700호(戶)이고 옛 성에 들어간 자는 220호이니 경내의 장정을 총계하면 2,300명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부족한 것은 군기입니다.” >---- >승정원일기 - 갑술년(1635) 9월 18일 >도원수(김자점)가 아뢰었다. >“백마산성에 입방할 군사로 현재 의주에 있는 자가 1,600명인데, 이들 군사로 하여금 돌아와 안주를 지키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군사들을 모은다면 의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략) 정식으로 부방하는 남군(南軍) 2,400명을 백마산성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고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임경업으로 하여금 실패 없이 굳게 지켜 보전하도록 한다면 국사에 있어서도 다행일 것입니다.” >---- >승정원일기 - 병자년(1636) 3월 4일 >병자년 정월, 이에 장군(임경업)이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장군은 또 비국에 말하길 "오랑캐의 남목(南牧)할 기미가 이미 드러났으니, 바라건대 2만 병력을 얻어 막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비국이 처음에 따르지 않다가, 장군이 이를 쟁론하자 억지로 이에 해서(海西)의 2천 병력을 허급(許給)하였다. >---- >지호집 임장군전 임경업은 또한 사람을 모집해 압록강 이북에 있는 송골산(松鶻山)과 봉황산(鳳凰山)에 정찰조를 투입해 연락망을 설치했다. 이들은 밤이면 횃불을 들고 낮이면 총포를 쏘는 것으로 의주에 연락을 보냈으며, 일반적인 [[봉화|봉수신호]] 체계에 따라 아무런 일도 없으면 1거,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2거, 적이 국경을 넘으면 3거,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4거, 적의 대군이 들을 뒤덮으면 5거를 보내도록 했다. 이 연락망은 의주에서 평안도를 종단하여 도원수 김자점이 있는 황해도 황주까지 곧장 연결되어 있었고, 병자호란 초기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또한 살림과 장비를 넉넉히 지급하고, 그 부모처자를 매어두되 양곡을 지급하며 여러 주둔지의 짚과 꼴을 산성으로 모두 수송했다. 이때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서 각 주둔지의 가축이 수백 두가 폐사하기에 이르니, 모두 포(脯)로 만들어 저장하였다. 쌓아둔 섶이 산과 같아, 대개 초둔(草芚)으로 군량인 것처럼 하였다. 산성에 우물이 부족해 큰 못을 파서 물을 담아두고 물고기를 길렀다. > >이때 조정에서 척화가 득세하여 신사(信使)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장군에게 심중(瀋中)으로 상관(象官)을 보내어 사신단이 장차 다다를 것임을 고하게 하니, 대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상관에게 경계하길 "사신단이 늦어졌으니 적병이 분명히 움직일 것이다. 만약 백마(白馬)의 일을 협박하여 묻는다면 너는 모름지기 대답하길 '여덟 장수가 각기 3영의 군사를 인솔하고 들어갔으며, 무기는 예리하고 군량은 풍족하여 수년을 버틸 수 있다. 성 안에 다시 한 커다란 못이 있어 어룡(魚龍)이 둥지 삼는 곳이라 한다'고 하라"고 하였다. 상관이 과연 통원보에서 오랑캐와 만났는데, 백마의 허실을 물으니 장군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 >12월에 봉황(鳳凰)ㆍ송골(松鶻) 봉수가 적병을 보고 2거(炬)를 올려 경보를 보고하니 이에 치계하여 아뢰었다. 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즉각 변란을 보고하지 않아서 대가가 창황하여 겨우 남한(南漢)에 들어갔다. > >장군은 곧장 부민(府民)들이 백마성 안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하고, 몸소 전후(殿後)가 되어서 들어갔다. 또한 흰 천의 장막을 지어서 성 안을 잇대 가려 멀리서 바라보면 성첩이 흰 것처럼 하였으며, 매 성첩마다 돌덩이를 많이 쌓고, 모든 성중 남녀에게 함께 성첩을 지키게 하였다. 3첩마다 한 토우(土宇)를 지어 토우 안에는 술 몇 말을 담가두고, 군사들이 번갈아 쉴 때 마셔서 추위를 막게 하였다. 또한 우포(牛脯)를 나누어 보내니, 군중의 환성이 우레와 같았다. > >오랑캐 군 선봉이 경내에 들어와 백마산성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경성으로 향했다. 장군이 사람을 시켜 묻길 "어찌 허다한 군병이 갑작스럽게 이웃나라에 들어와서는 변신(邊臣)에게 말하지도 않는가?"하니, 오랑캐는 답하길 "국왕과 정약(定約)해야 하니 변신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라 하고 말미암아 멀리 달려 나아갔다. 이윽고 대군이 들을 덮으며 뒤를 이었지만 끝내 백마산성을 범하는 자는 없었으니 그 준비가 있음을 알았음이다. > >(오랑캐가) 남한산성에 나아가 포위하고 오랑캐 백여 기가 심중(瀋中)으로 돌아가 보고하니 장군이 병사를 거느리고 성을 내려와 압록강에서 추격하여 그 장수를 죽이고 사로잡힌 남녀 120여 인과 말 60여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 >오랑캐 임금이 돌아가니, 조정의 명을 받들어 성을 나와서 서윤 홍익한(洪翼漢)이 압송되어 심(瀋)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는데 차원(差員) 변대중(邊大中)이 결박한 것이 몹시 심했다. 장군이 나와 보고는 그 결박을 풀고, 손을 잡고 위로하길 "명공(明公)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여비를 넉넉히 부조하니 홍익한이 감탄하였다. >---- >지호집 임장군전 이렇게 방비를 철저히 했다는 지호집의 이야기도 있지만, 청군은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의주의 백마산성 공략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우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임경업은 병자호란 및 대청전선에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다. 임경업은 전쟁기간 내내 백마산성에 주둔했지만, 청군의 보급로를 끊지 못했으며, 청군은 한성까지 파죽지세로 돌진하여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청군은 삼전도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의 왕자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및 그 가족들]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강화가 맺어치고 이렇게 본국으로 철수하는 부대중에 청태종의 조카, 즉 누루하치의 손자인 요퇴(要魋)가 지휘하는 300명의 청군을 공격해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인들 120명을 구했다 '''이것이 사료에 나온 임경업의 유일한 대청군공이다.''' 이것이 뻥퇴기가 되어 요퇴를 참살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것은 임경업의 행적이 신화화되면서 나타난 전설로 이해되며, 요퇴는 멀쩡히 살아서 그 이후에도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누르하치]]는 아들만 13명이 넘고, 손자는 더 많기 때문에 임경업의 요퇴 참살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요퇴라는 인물이 중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전설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인들의 [[정신승리]]의 일종으로서, [[박씨전]]에서 병자호란 이후 철군하는 [[용골대]]를 임경업이 대패시켰다는 창작이 가미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