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경업 (문단 편집) == 사후 평가 상승 == 임경업은 역모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옥사했지만, 그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친청파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지박산 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역적]]에게 참소당한 [[충신]]'''으로 높아졌다. 게다가 조선의 전반적인 반청 분위기에서 재평가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사후 50년 만에 [[숙종(조선)|숙종]]은 그를 옛 관직에 추서하고 '''충민공'''이란 시호를 내려 완전 복권되었다. 이와 함께 임경업을 모시기 위한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사당]]도 함께 세웠다. 민담을 모아놓은 <[[청성잡기]]>에 보면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하면서 [[기생]] 출신 애첩을 지인에게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효종(조선)|효종]]이 [[북벌]]을 하려는데 임경업 같은 인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임경업의 애첩[* '사랑하는 [[첩#s-1]]'을 뜻한다.]을 불러올려 "어찌하면 임경업 같은 이를 얻겠냐?"고 물었는데, 이 첩은 "설사 임경업 같은 이가 있어도 전하께서는 [[북벌]]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효종이 웃으며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고 묻자, 임경업의 첩은 "과거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 효종)께서 능히 [[김경징]]을 베어 죽일 수 있었으나 그 간단한 일도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북벌을 할 수 있겠냐?!"며 "이는 계집인 자신도 안다."고 대답했다. 효종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이 김경징을 자의로 참했으면, 효종은 인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 분노는 둘째 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은 군주에게만 있다고 했으니... 물론 [[김경징]]의 병크를 보면 봉건대군이 이적행위를 해서 참했다고 최대한 변명하면 될 가능성나마 없는건 아니다. 인조는 김경징의 삽질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김류가 김경징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서야 김경징이 사약먹고 죽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도 아니고 차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저 때 인조의 마음에서 엇나갔다면 조선 국왕 효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외에도 인조에게는 [[인평대군]]이라는 대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일:attachment/임경업/임경업부인비.jpg|width=400]] 그의 아내 완산 이씨[* [[진안대군]]의 7세손]의 경우 남편과 같이 청나라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청나라에서는 아내의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감동하여, 시신을 정중히 조선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충렬사]]에 정렬비가 세워져있으며 그 충렬비의 이름은 '''대명충신''' 조선 임 장군 경업 처 정부인 완산 이씨 정렬비(大明忠臣 朝鮮 林 將軍 慶業 妻 貞夫人 完山 李氏 貞烈碑). '''명나라를 향한 임경업과 그 아내 완산 이씨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함이라면서 꽤 오랫동안 조선이란 단어가 빠져있었다. 뭐 충렬사를 관리하는 충주시의 디지털충주문화센터 홈페이지에서도 잘못 적혀 있었으니. 참고로 저 조선이란 것은 단순 출신지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명충신 부분에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다. 애초에 저 비석 자체가 임경업을 복권한 숙종 때에 세워졌다. 다만 명나라에서 세운 것도 아니고, 숙종 때 조선에서 세운 비석에 마치 명나라의 속국을 자칭하는 것처럼 썼으니 이후 후손들이 보기에 영 기분이 좋진 않았을듯. 그래서인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명충신' 부분을 언짢게 여겨 정렬비는 보관하고, 정렬비의 내용만 '''한글'''로 새긴 비석을 따로 세울 것을 검토케 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11240032920700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11-24&officeId=00032&pageNo=7&printNo=10201&publishType=000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