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문단 편집) === 신분제의 유지와 권위주의 === 간혹가다 몇몇 사람들이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신분제를 철폐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된 것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인 1894년 [[갑오개혁]] 때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8_00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자면 오히려 일본 덕분에 친일파 양반들이 신분제 비슷한 덕을 본 경우가 더 많다.'''[* 친일파 양반까진 아니더라도 지주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여건상 당연한 일이다. 사학자 표학렬에 의하면 조선-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양반 대지주출신들이 재벌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갑오개혁 시기에 사라졌어도 신분 차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기 때문에 일제가 신분제에서 조선 민중을 해방했다는 억지 주장도 나오지만, 그런 논리라면 1920년대에도 평민 들의 참정권을 주장하던 민주주의 운동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일어나고 현대까지도 [[부라쿠민]] 차별이 남아 있는 일본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신분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아주 황당한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법적 신분제 철폐가 아닌 실질적으로 사회속에서 신분 차별이 사라진 것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이기 때문에 애초에 원인과 결과가 모두 틀린 주장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천민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를 존속시켰다. 대표적으로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60_0050_0020_0040]] ]하였다. 그래서 백정들은 학교를 다니려고 해도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이 형평 운동이다. 사실 천민 차별은 일본도 마찬가지라 일본에서도 수평 운동이 일어났다. 의외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양반, 사무라이 같은 귀족 출신들[* 이들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주로 방관하는 쪽에 가까웠다. ][* 귀족들에 대한 편견과 달리, 전쟁범죄 등도 당시 귀족들 사상이나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은 오히려 귀족들이 대부분 하지 않았다. 일본 귀족들이 부하들보다도 더 막장인 식인귀 두목처럼 묘사된 소문 등은 대부분 날조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처벌도 잘 받지 않았는데 과장되었거나 진짜로 안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딱히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영국 같은 곳들의 귀족들도 민중적 관점이나 민중사관에 의해 날조된 게 많다. 프랑스에서 민중 출신 장교들도 미화가 많이 되었으나 현실로 보자면 일부 개인을 제외하면 진짜 목숨조차 걸고 싸우는 영국이나 독일 등의 귀족 장교들보다 훨씬 못난 인간들이었다. ]보다 평민들이 천민들에 대한 반발[*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3500&code=kc_age_40]] ]이 특히 심했다. 조선에서도 그런 반발로 농민 같은 평민들에 의한 반형평 운동이 일어났는데,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축하식 다음날에 진주 지방의 농민 2,500명[* 이들은‘형평사에 관계가 있는 자에 대하여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할 일, 우육은 절대로 비매(非買)동맹할 것. 진주청년회에 대하여 형평사와 절대로 관계가 없도록 할 것’ 등을 내걸며 반형평을 주장했다.]은 바로 형평사 본부를 습격했다. 이런 반형평운동은 진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평민들은 백정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모자인 ‘평량립’을 쓸 것을 강요했고 백정들에 대한 교육을 거부했다. 심지어 홍산사건으로 음식점에서 중국인이 시비를 붙은 형평사원을 폭행하자 평민들은 오히려 중국인에 동조하여 백정을 폭행하였다. 다른 예로, 1925년에 수천 명의 농민이 예천형평분사를 습격한 ‘예천사건'의 대응이 있다. 1925년 8월 9일 예천청년회장은 축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면서 일어났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국가를 물론하고 국법이 있는 것이다.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결코 개인의 죄악이나 사회의 죄악이 아니다. 또 조선왕조 오백 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마는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평민들은 이 발언에 동조하여 형평운동이 필요없다며 형평분사를 공격하였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군중들이 형평사원의 집을 약탈하고 형평사원을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제는 자신들도 천민 출신들을 탄압[* 예를 들어, 일본과 조선에서의 일본인 문맹률은 대부분 일본 천민들이 차지했다.][* 이영훈 교수가 쓴 칼럼에서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때려잡은 덕에 백정이 학교에 간 사례가 있다고 하는데, 그 반례는 차고 넘친다.]하고 있어서 그런지 백정에 대한 조선 평민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더욱 부추겼는데, 형평 운동이 전국적으로 세력이 더 늘어나고 기관지 세광 등을 통하여 백정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하자 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일본과 달리 형평 운동에 동조하는 조선 양반들[* 물론 친일파 양반들보다는 주로 독립운동하던 양반들이었다.]이 점점 늘어나자 일제는 곧 제대로 된 형평운동 탄압에 나섰다. 일제는 1927년 ‘고려혁명당사건’과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인터넷 댓글 중에는 조선시대 천민이었던 할아버지가 일제 덕에 출세했다는 근거 미상의 글들이 많이 있는데, 정작 조선시대에도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30122/52512357/1|평민들은 물론이고]] 천민 출신으로서 [[장영실|국과장급 인사까지]] [[정충신|성공한 예들도 존재한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32116&bbsId=BBSMSTR_1008&mn=NS_01_09_01|#]]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천민은 물론이고 평민조차도 그러한 신분상승의 사례가 많지 않다. 기껏 상승해봤자 동네 이장이나 헌병 수준까지만 허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