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문단 편집) === 사회 분위기에 대한 고찰 === 일제강점기의 사회 분위기는 계층별로 복합적이었고 그 기저에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친일파 양성정책, 조선을 편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개발 의도와 군수공장과 요새로 사용하려고 한 병참기지화가 혼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 정책의 피해자인 다수의 못먹고 못살던 조선인들, 친일파 양성정책의 혜택을 받은 지주 및 자본가들, 일제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느낀 사회 분위기가 각자 달랐다. 일부는 일제강점기가 35년이나 지속된 것에 대해 다수의 조선인들이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이를 묵인하고 침묵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을미사변]]으로 왕의 부인도 자기들 맘대로 죽였으며[* 이는 지금도 끔찍한 짓이지만 당대관점에서는 더욱 의미가 큰데 당시에만 해도 서구에도 왕정, 제정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당시에는 신분>인종이라서 아무리 식민지인이라고 해도 왕족이나 왕이라면 서구 열강들도 식민지인이라고 차별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공사라는 사람이 밤중에 사람들 우르르 데리고 왕비를 살해한 사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실제로도 세상에 사건이 드러나자 일본은 비난에 시달렸으며 결국 주모자인 미우라 고로를 잠시 가둬야 했다.] 고종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이게 그냥 고종이 굴복해서 제위를 내려놓았다면 강압적이었지만 이 정도는 서구 열강들도 한 것이라 그들과 같은 선에서 봐줄 수 있겠지만 '''일본은 그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닌 게 문제다.''' 정확히 말해서 고종은 '''양위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대리청정이나 그런 말은 몰라도 양위는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양위식도 대리인 두 사람을 내세워서 가라로 진행했다. 즉 당대 관점에서 보면 고종은 그냥 어느 쪽으로 봐도 일본에게 [[찬탈|제위를 뺏긴거다.]]] 만행을 보여줬다. 일제는 정치판뿐만 아니라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들과 의병전쟁이 일어나던 지역사회를 도륙내어 일본에 대한 저항 분위기를 두려움으로 바꿔버렸다. 1910년대에 헌병경찰통치를 하며 범죄즉결례로 재판도 없이 경찰이 맘에 안 드는 [[조선태형령|조선인들에게 바로 태형을 가한 것]]은 더욱 사회 분위기를 복종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1919년에 3.1운동으로 참다못한 조선인들의 반발이 대거 터졌으나 일제는 인정사정없이 총칼로 유혈진압했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으로 저항 여론은 언론을 탈 수도 없던 시기였고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서 불구로 만들거나 순국하게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말기로 치닫을수록 최하부까지 애국반으로 조선인 가구들을 묶어서 감시하고 통제하게 했다. 왕가는 물론이고 일반인 가구 1세대까지 다 장악하는 이같은 제국주의적 폭력과 학살과 탄압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일반 조선인 개개인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다 알 순 없으나 총칼의 공포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일제하의 조선 사회가 다수의 조선인들의 묵인으로 지배계급만 양반에서 일본인들로 바뀌었을 뿐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와 나치독일의 프랑스 지배가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멍청함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 지주와 자본가들은 일제의 포섭대상이 되었고 이 중에서 친일로 빠진 이들은 일제가 제공한 풍족함을 영위했다. 이들의 양복으로 대표되는 의문화와 서양식과 일식이 혼합된 식문화, 서양건축과 [[적산가옥]]이 포함된 주택 문화, 신소설, 영화, 음악 등 예술 문화로 꾸며진 생활 양식은 앞에서 말한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과 딴판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친일도 용납했을 뿐더러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황군에 입대하여 피를 뿌리자고 일반 조선인들을 선동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게 [[태평천하]]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지만 지주에 돈으로 족보를 사고 손자 둘을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만들려고 기를 쓰는 윤 직원은 태평천하라 말하며 철저한 친일 성향을 보인다.] 2008년 영화 <모던 보이>에서 나오는 주인공 이해명([[박해일]] 배우)의 삶이 그런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당시 조선 내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취미 잡지를 표방하며 나온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47367&cid=60545&categoryId=60545|별건곤]][* 종합지였던 <개벽>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정치색과 사회색을 최대한 빼다보니 취미 잡지로 출간하게 된 것이다.]의 창간취지를 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대 조선인들이 소수의 유산자와 대다수의 무산자로 나뉘어 생활과 문화를 극단적으로 다르게 영유했음이 드러난다. > 보라! '''오늘날 조선 사람치고 인간적 취미를 가지고 생활하는 자 몃 사람이나 되는가?''' 월급 푼에 팔려서 다이푸라이타 모양으로 살아가는 관공리(官公吏) 급(及) 교원(敎員), 회사원이 잇스니 그네들에게는 인간적 취미가 풍부타 할가? 물론 먹고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뿐이 생활의 취미는 아니다. 상리(商利)에 몰두되여 점포에서 공장에서 로로역역(勞勞役役)하는 상공업자가 잇스니 그네들에게 인간적 취미가 풍부타 할가? 그 역(亦) 먹고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뿐이 생활의 취미는 아니다. 진실로 그럿타. 우리 조선에 [[영화관|활동사진관(活動寫眞館)]]이 몃 개지만 [[그림의 떡|그것이 노농대중에게 무슨 위안을 주엇스며 무도(舞蹈), 음악이 유행하지만 그것이 또한 노농대중에게 무슨 취미가 되엿느냐? 박물관, 동물원, 공원, 극장이 다 그러하다.]] 그것은 다 일부 인사의 독점적 향악(享樂) 기관(機關)이 되고 마랏다. 우리의 노농대중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든지 이 빈취미증(貧趣味症)을 면(免)해 볼 길이 업다. 이제 만성(慢性)에서 운명을 재촉할 뿐이다. 화류계에 출입하며 가무고취(歌舞鼓吹)와 [[주지육림|주지육림(酒池肉林)]]에 흥겨워 노는 것을 위안으로 하는 사람도 잇지만 돈업는 사람은 천만부당한 일, 등산, 기차 여행 등을 취미로 아는 사람도 잇스나 그것을 실혀하는 사람도 잇고 그것이 못되는 사람도 만타하면 민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온천, 약수도 또한 그러하다. [[바이올린|삐이오린]], [[만돌린|만또린]], [[오르간|오루간]], [[피아노|피어노]]를 가춰놋코 사이사이 한 곡조 울리는 것을 유일한 취미로 아는 신사숙녀가 잇지만 [[불가능|그는 더욱 유산계급의 향악소위(享樂所爲)이고 대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 [[현진건]]의 작품 <고향>에서 드러나는 일제강점기 일반 조선인들의 사회상은 [[https://happien.tistory.com/512|더욱 비참하다.]] > 그의 고향은 [[대구광역시|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였다. 한 백 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붙이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역둔토는 둔전을 말하며 둔전은 나라에서 관리한다. 즉 지주들 땅을 파먹는 것보다는 당연히 남는 게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양척식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나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작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이런 구조는 마름과 조금 비슷하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의 삼 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소리는 [[승려|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 갔다. ... "이야기를 다 하면 무얼 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내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저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도로|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집창촌|유곽]]으로 가고요..." > {{{#!folding [윤봉길 의사 처형 직전 모습] ||[[파일:윤봉길 처형 직전.jpg|width=100%]] || ||<-2> [[윤봉길]] 의사의 처형 직전 모습. ||}}} [* 처형 사진이므로 접기처리하였다.] 평범한 조선인들보다 더 억압받고 친일파들이 누린 이득과는 거리가 더 먼 삶을 살았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들이 느꼈을 사회적 분위기는 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언제 일제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발각됐을 경우 처참한 고문에 처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광복이 될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 [[일제강점기|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제2차 세계 대전|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8.15 광복|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 [[제행무상|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 >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 따라서 [[홍커우 공원 의거|이번 사건]]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한국독립운동|독립운동]]과 관련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굳게 믿는다. >---- >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 의거|의거]] 이후 취조에서 밝힌 거사의 이유[[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3672|#]] > ||[[파일:이승만귀국2.jpg|width=100%]]|| ||1950. 2. 16. 일본 도쿄.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도착 사진. || 일제강점기 이후 귀국해 남한지역에 건국을 준비하는 세력은 크게 2개 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있었고.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있었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902179_STD.jpg|width=100%]] ||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귀국 전에 [[중화민국|중국]]에서 찍은 사진. || 중앙에 있는 김구와 오른쪽 아래에 중절모를 쓴 이시영을 보자.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광복이 되었음에도 무념무상의 표정이고, 나중에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은 그 동안의 고생과 광복에 눈물을 닦고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느끼었던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주는 사진이다. 이러한 사회의 각각 다른 방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것이 일제가 [[조선지원병]]을 모집했을 때 나타난 상황이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반 강제적으로 말만 의용이지 사실상 징집되었다. 한편 이중에는 진짜로 자발적으로 지원한 인물들도 있었다.이 자발적 지원자들도, 각각 궁핍한 경제사정 때문에, 명예욕등의 신분상승을 위해 지원한 이들이 대다수였고, 조선지원병 문서의 우수용 회고록에서 본인이 언급하듯 자신의 참여로 조선의 자치를 좀더 강화해, 일본 내 조선의 영향력을 키우려 했던 이들도 있었다. 여하튼, 중요한점은 일제강점기를 평가할 때는 위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특히 침묵당했던 다수층을 일방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태도다. 여기서 왜곡이라고 하는것은, 모두를 식민지배에 찬성한 것으로 보는 것도 왜곡이지만, 반대로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려고 했다고 하는것도 비록 불편하겠지만 왜곡은 왜곡이다. 오히려, 강요된 침묵 속에서 상황에서 가만히 있던 사람이 절대 다수인 와중에도 그들과 달리 극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깨고 적극적으로 항거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더욱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