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회의 (문단 편집) === 두 조직의 결합 === 이 두 조직이 결합한 데에는 당시 두 조직의 사무국이 하나였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두 단체는 당시만 해도 공식적인 간판을 달고 활동하는 단체가 아닌 어디까지나 우익계열 유명인사들의 사모임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양 단체 모두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사무국장 역할을 형식적으로 맡았다. 당시 양 단체의 사무국장을 겸임하던 인물은 메이지신궁의 전 신관 도야마 가쓰시와, 생장의 집 학생조직 출신이었던 가바시마 유조였는데, 원호법제화 운동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양 조직의 임원회에 조직의 통합을 설득하였고, 이를 각 단체의 대표가 받아들이면서 1997년 일본회의가 탄생했다. 일본회의의 설립대회는 1997년 5월 30일 도쿄 기오이초에있는 호텔 뉴오타니에서 열었다. 당시 일본회의의 기록에 따르면 설립대회에는 우익인사 약 1천여 명이 집결하였는데, 신사본청 총장에서부터 당시 메이지대학의 총장, 유력기업가와 예술계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상당히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설립대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인 29일 뉴오타니에서는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의 설립총회가 열렸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개별 의원들이 우익계단체와 연동하여 활동하거나 소규모 단위의 파벌에서 함께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100여 명이 넘는 국회의원들이 이 총회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우익계열 의원들의 대규모결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회의 측 자료에 따르면 대리출석을 포함하여 설립총회에서는 115명이 참가하였고, 총회 이후 보름이 지나자 입회자 수가 2배가량 증가하여 중의원 133명, 참의원 71명이 이 모임에 이름을 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