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회의 (문단 편집) ==== [[생장의 집]](세이쵸노이에) ==== 생장의 집은 1930년 타니구치 마사하루가 창설한 종교로,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원래 또다른 신흥종교 [[오모토]](大本)에서 편지 포교라는 일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오모토를 탈퇴해서 개인잡지 <생장의 집>을 발간했는데, 여기서부터 종교단체 '생장의 집'이 시작했다. 타니구치 마사하루가 생명의 실상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사하루가 쓴 책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 종교적인 교리를 주장하였다. 성공한 사이비 종교가 늘 그렇듯, 실제로 병이 나았다는 신자가 쇄도하면서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 별 다를바가 없으나, 타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를 세우기 이전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요,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민족 중심주의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생장의 집이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한창 태평양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 본래 [[오모토]]도 상당히 우익적이고 일본중심적인 종교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극렬한 우익사상과는 선을 그은 데다가, 한편으로는 좌파적인 세계보편사상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 제국 시절에는 오모토가 위험한 종교단체라 하여 정부가 1921년과 1935년에 법을 반쯤 무시하고 탄압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오모토의 양면성은 마사하루 같은 우익인사들이 오모토에 입교하는 계기이자 탈퇴하는 이유가 되는 등 양날의 칼처럼 작용했다.] 이 시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둥 '천황 신앙'을 설파했다.[[http://blog.daum.net/timur122556/3835|출처]]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대일본제국은 신국이고 천황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교리로 발전했다. 이러한 '천황 신앙' 중심의 교리와 전쟁 당시의 광기를 발판으로 생장의 집의 교세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그 교세가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종전 후 GHQ는 타니구치 마사하루에게 집필활동을 금지했지만, GHQ 체제가 종결된 후 생장의 집은 다시 활동을 시작, 전후 헌법을 '점령헌법'으로 규정해 부정하고, 모든 주권을 천황에 봉헌해야 한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을 담은 저작을 연이어 출간하여 우파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조직하고, 당시 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하였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천황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하였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이며 노동성 대신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하는 결과를 이끌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 결성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의 소멸이라는 전환을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2009년 창교주 타니구치 마사하루의 손자 타니구치 마사노부(谷口雅宣)가 생장의 집 3대 교주로 취임한 후 교단의 색깔을 바꾸었다. 3대 교주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정련과 생학련 등 정치결사 일체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의 중지와 특정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중지를 발표하며 정계와 스스로 단절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10년대 들어서는 창교주의 극우적 사상을 비판하고 이런 교리에 따라 행동하는 극우 인사들의 행적, 즉 일본회의의 활동과 아베 총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교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현재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 및 일본 내 우익과는 연관이 없다. 그러나 1-2대 교주 시절 생장의 집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교리를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들이 일본회의의 운영과 행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베 신조의 씽크탱크이자, 일본회의와의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장이자 아베 신조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2019년까지 총리보좌관이었던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가 생학련 출신이다. 또한 일본회의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 원호법제화 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의 모든 '국민운동'을 설계하고 실무를 책임져온, 현 일본회의 사무총장 가바시마 유조(椛島有三) 역시 생학련 출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