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제 (문단 편집) == 개요 == 일본제([[日]][[本]][[製]][* Made in Japan(メードインジャパン) 라고도 한다.])는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을 의미한다. [[대한민국|한국]]에서는 줄여서 '일제'라고 흔히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日本製'라고 하고, '日製'는 [[히타치 제작소]](日立 製作所)의 줄임말로 통용된다. 좁은 뜻으로는 [[일본]]에서 생산된 물건을, 넓은 뜻으로는 일본의 [[제조업]](계)까지를 뜻한다. 미국, 독일과 함께 제조업선진국으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며, 특히 기계부품이나 산업기계 등 정밀 가공에 압도적인 강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 중국 등 신흥국의 발흥과 [[2000년대]]의 장기간 [[엔고]]로 경쟁력은 점차 떨어지는 추세이며, [[2010년대]]에는 몇몇 제품들에서 품질이슈가 불거져 기존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현대 일본 산업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고품질, 정밀생산이란 이미지와 달리 1960년대까지 일본은 공업 제품의 품질에서 뒤떨어진 나라였다. 사실 일본은 빠르게는 17세기부터 [[도자기]] 등 일부 제품군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는 [[산업화]] 이전 [[가내수공업]]의 틀에서 받던 평가였으며, 이 또한 어디까지나 [[자포네스크|서양에 없던 개성적인]] 제품이 주목을 받았지 제품의 품질과는 거리가 멀다. 소위 장인 정신이나 '''모노즈쿠리(物作り) 정신'''[* <모노즈쿠리 - 일본의 제조업 전략>의 저자 후지모토 다카히로에 따르면 일본은 소위 '''조율형''' 산업에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듈형'''과 대비되는 말로서 디램 반도체는 갈아끼울 수 있기 때문에 모듈형이고 디램 반도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반도체 소재 제품들은 후공정 혹은 고객사(디램 반도체 생산 라인)의 최종 수율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스테이크 홀더간의 조율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조율형이라 부른다.]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이러한 가내수공업의 기능(craftmanship)이지 현대적인 기술(technology)와는 거리가 멀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내수공업의 발달이 반대로 대규모 공업의 발달 지체로 나타나면서 거꾸로 현대적인 생산관리나 품질관리 등의 도입이 주요 열강에 비해 늦어지고 공업 기술력이 부족해지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 부족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1940년대 [[태평양 전쟁]]으로, 기술 부족과 총력전으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 고갈이 함께 겹치면서 [[제로센]] 등 전투기부터 전차까지 무기의 성능과 신뢰성이 부족한 것이 패전의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상대국인 미국이 이미 전체적인 기술력에서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특히 그 전부터 품질관리 방법론을 개발하면서 압도적인 우위에 선 것과 대조된다.[* 대량생산 체제의 아이콘 [[헨리 포드]]뿐만 아니라 월터 슈하트(Walter A. Shewhart)가 1920년대에 관리도를 개발하는 등 발전이 있었다.] 그나마 아시아권에서는 절대 우위였지만, 이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는 잘 만들었다'''에 지나지 않는다. 자력으로 간단한 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생산라인을 갖출 수 있는 나라가 당시에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에서 그나마 근대화를 이뤘던 나라도 없다시피 했다. 패전 후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복귀한 일본은 경제 재건을 위해 공업 부흥과 수출에 나섰다. 마침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이 일본 제품을 의식적으로 수입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거 봐. 일제라서 잘 고장나지'였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백 투 더 퓨처 3]]에서도 이를 인용한 대사가 있다.[* [[후지타 덴]]의 자서전에 보면 1950년대 미국에 식기류를 납품할 때의 일화가 있다. 일본의 납품업자들의 물건은 '나이프와 포크는 우리가 최고지.' 하는 장인정신이 넘치긴 했지만 제품간 품질편차가 컸고, 무엇보다 (발주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정된 납기를 두 번씩이나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그만큼 주먹구구식이였다는 것이다.] 일본 또한 공업의 품질관리가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미국에서 W. 에드워즈 데밍(W. Edwards Deming) 등 전문가를 초빙하여 미국의 품질 기법을 배우게 된다.[* 데밍은 초년 시절 상기한 관리도의 창시자 슈하트에게 지도를 받았던 사람이다. 1951년에는 그의 기부를 받아 일본에서 품질 발전에 공로가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수여하는 데밍상이 제정되었다.] 이런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이다. 이 당시는 개발도상국이 [[수입대체산업화]] 혹은 그와 유사한 정책으로 무역장벽을 형성하고, 외국 기업의 시장 진출을 대가로 기술이나 자본을 유치하는 형태의 산업구조가 유행하였다. 일본의 경우 일제 당시 근대화의 유산, 그리고 [[6.25 전쟁]] 특수 그리고 탄탄한 내수가 있어 이러한 과정을 상당부분 생략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미국 기업을 상대로 같은 방식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연히 기술 전수, 제품 카피, 라이센스 생산 등을 동원하여도 초기에는 미제에 비해 열약하기 그지없는 품질을 자랑했고 이를 자국민에게 밀어넣으며 생산 노하우를 쌓아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50년대에는 미국이 일본을 자본주의 일원으로 키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술전수를 해주고 조악한 물건을 수입해주기까지 했다. 반면에 일본기업들은 내부적으로 카르텔을 형성, [[내수차별|국내에서는 자국민에게 원가보다 비싸게 제품을 판매하면서 반대로 미국에는 헐값으로 덤핑 수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생산 노하우를 축적해갔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Television_Cartel|일본 TV제조사 카르텔]]이 이 중의 하나다. 물론 상기 이유로 미국에서는 알면서도 60년대는까지 눈감아 줬다. 그러다 70년대 냉전이 어느 정도 약화되어 의도적으로 키워줄 이유가 줄어들고, 일본상품의 기세가 생각보다 커져 미국 제조사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미국에서도 통상마찰 등으로 반발했다.] 세계적으로 일제가 싸기만 한 짝퉁으로 유명했던 시기도 이 시기다. 하지만 생산 노하우가 축적되다보면 품질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이러한 경제 모델의 근간이고, 덤으로 일본은 거대한 내수시장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빠른 초고도성장까지 이어가다보니 노하우 축적 속도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즈음이 되면 일본이 세계 3위 경제대국에 등극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미제와 일제가 품질면에서 차이점이 없어졌고, 특히 일본 자동차는 어느 정도 자가용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포화상태에 다달을즈음에 [[오일 쇼크]]를 제대로 활용하면서 미국차를 시장에서 밀어내면서 미국 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하는데 성공했다. 미국 자동차와 일본 자동차는 주거환경에 발맞춰서 설계되었는데 미국은 뉴욕이나 보스턴같은 오래된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도로폭이 넓었기 때문에 차를 굳이 작게 만들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도로폭이 주요 간선도로도 4차선 안팎으로 설계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에 맞춰 차를 설계했는데 처음에는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고도경제성장과 함께 기술력이 급성장하고 거기에 주거환경으로 자동차 설계가 도리어 장점이 되면서 재빠르게 기름 덜 먹는 차를 양산할 수 있었고, 미국차는 그러지 못하면서 1970년대 중후반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급속히 늘렸고 미국자동차 시장에서 일본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었다. 미국에서 자동차 제조업의 비중이 높았던 [[디트로이트]]가 쇠퇴하고 치안부재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만 디트로이트를 위시한 러스트 벨트의 쇠퇴는 일본의 발흥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특히 큰 요인이 급격한 생산성 발전으로 고용 수요가 줄어든 것과 인건비가 저렴한 남동부로 자동차 산업이 대거 이전한 것이다.] 전자제품 역시 [[신칸센]]을 시작으로 해서 첨단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고 이윽고 1970년대 중후반이 되면 (당시로써는) 첨단 전자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빨리 여타 전자제품도 미국 전자제품 시장을 장악해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렇듯 싸구려 자국산을 무역장벽으로 인해 억지로 소모하던 상황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기술력의 향상으로 품질이 향상되나가면서 뒤집었고 특히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로 일본인의 구매력이 과대평가되면서 완전히 일변하여, 이젠 수출용 제품보다 내수용 제품을 공들여 만드는 상황이다. 거품 붕괴로 내수가 침체된 이후에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 1970년대 당시 미국의 고금리 정책과 이후 이어진 [[레이거노믹스]]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일본이 열심히 쫓아가던 미국의 제조업이 자기들끼리 고꾸라지면서 자연히 일제가 부상할 환경이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플라자 합의로 가격 경쟁력이 하락하긴 했으나 첨단산업에서 자리를 잡은 일제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오히려 일본 완성품 제조업의 부진은 엔고가 만성화되는 와중 1980년대 한국, 2010년대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가격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