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일본인 (문단 편집) == 역사 == 일본 열도가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고고학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문명의 급격한 발전이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조몬 시대엔 관개 농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석기만을 사용하다가 야요이 시대에 와서 농업은 물론 순식간에 철기까지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양 시대간의 기술력 격차가 눈에 띄게 동떨어져 있다. 애초에 야요이 시대가 고고학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나타난 발전 양상이 비정상적으로 급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일본(야마토)이 [[헤이안 시대]]를 거치는 동안 원주민들인 조몬계 집단(에조)은 열도내에서 별개의 부족 사회인 채로 존재했으며, 반복되는 일본의 압박에 지쳐 투항하고 복속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일본이 재정적인 문제로 에조 정복을 멈춘 시기에도 일본에 복속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한 에조 지역의 부족들(에미시)이 자발적으로 복속하는 일이 상당히 많아졌다. 조몬계(에미시)가 자발적으로 복속한 이후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 그 권역내에서 후손을 퍼뜨리며 살았다면 당연히 야마토측에선 쓸데없이 국력을 소모해가면서 절멸할 필요가 없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대우가 맘에 들지 않아 몇 차례의 폭동이 있긴 했으나 야마토측이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원하여 최종적으로 진압하였고 완전히 스며들었다. 이러한 귀화 이후에도 일본인(야마토)들의 인종차별과 분리정책으로 인해 수 세기동안 극빈층, 내지는 노예격으로 전락한 에미시 출신 일본인들이 많았다. || [[파일:external/www.hk-curators.jp/c04040a43a7be876882b33489a2922df.jpg|width=100%]] || || [[고전후 시대]] 일본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야마토계(야요이계)와 동북부의 에조계가 고대 이후에도 서로 다른 문화권이었음이 확인되는 미술 자료다. 오른쪽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야마토계고 왼쪽에 있는 3명이 에조계이다. || 또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도래인이 중심이 된 야요이계가 문화적으로 동부의 조몬계를 완전히 흡수한 시점은 엄연히 석기시대나 먼 옛날인 기원 전의 고대가 아니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헤이안 시대까지만 해도 조몬인 계통 집단은 에조(에미시)라 불리며 열도 동북부 지역에 부족 사회로 존재했으며 시기적으로 따졌을 때 당시 한반도는 [[남북국 시대]] 말에서 [[고려]] 초기였다. '과거로 갈수록 부계가 전멸하고' 등의 의견은 아주 오래된 상고시대라면 몰라도 이미 고전후 시대에 들어서 당시 사건들을 기술하는데 익숙하고[* [[가나 문자]]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서기 5세기 경에 야마토측에서 한자를 받아들이고 7세기를 전후로 초기 형태의 가나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요이와 조몬계의 열도 내 헤게모니 다툼이 완전히 종료되기 시작한 시점(대략 10~11세기)의 수백년 전부터 이미 문자를 쓰고 있었다.] 본인들의 왕국도 건설한지 오래인 그 시대의 일본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다.[* 당장 지금도 쓰이는 일본이라는 국명 자체가 야마토를 대신하여 지어진 시점도 [[덴무 덴노]]의 치세인 서기 600년대 였다. 일본이라는 국가 정체성이 조몬계(에미시)를 완전 정벌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시대적인 착오도 그렇지만 상당수의 조몬계 세력(에미시)들이 자발적으로 귀화한 기록, 심지어 그림들까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많이 간과한다. 애초에 노동력은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명분이 있는 게 아니라면 학살은 필요한 비용과 노동력을 고려했을 때 비효율적이다.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복속했는데도 죽여버린다면 전혀 복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흔히 쇼군이라 부르는 [[정이대장군]]은 동북부 지방의 오랑캐(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천황으로부터 군권을 이임받은 무가의 수장이었다. 정이대장군은 오랑캐 정벌을 위해 마련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데다, 서일본의 천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런 이유로 후에 둘의 권력 관계가 뒤집힌 것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조몬인]]의 직계 후예인 [[아이누]]인은 일본인(야마토 민족)과 문화적으로 '''굉장히 멀었고 일본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1869년 보신전쟁에서 아이누족이 주축이 되는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고 나서야 홋카이도가 완전히 일본 제국 치하에 들어갔으며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아이누를 구 토인(旧土人)이라고 본토인들과 완전히 구분해서 불렀다. 이게 불과 120~30여년 전인 19세기 중후반의 일이며 한참 이후인 20세기에도 아이누인들 사이에서 '우리는 일본인들과 다르다!'식의 아이누 민족운동이 열도 내부에서 성행하기도 하는 등, 대다수의 일본인과 아이누(조몬계)간의 서로에 대한 정체성 구분은 이처럼 사람들 생각 이상으로 확실했다. 이렇듯 조몬계의 경우 열도내에서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잃고 최북단으로 밀려나면서 단절이 되어버린 것.[* [[오키나와]] 지방은 일본어족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11세기 이전까지 패총시대로서 수렵 채집 위주의 원시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혈통적으론 에조의 조몬인 계통과 비슷했으나(정확히는 조몬인 계통과 오스트로네시아 혈통이 뒤섞인 사람들이 선주민이었다.) [[오키나와 제도]]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워낙 고립된 외지여서 문명이 생기기는 힘들었다.] [[일본어]]와는 완전히 별개의 언어인 [[포합어]] 체계의 [[아이누어]] 원형을 유지한 채로 지금껏 사용한다는 것도 가장 큰 예시이다.[* 이들 언어권은 러시아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에 분포되어 있다. 다만 러시아와 일본의 탄압에 의해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화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 일본에서만 10명의 모국어 화자가 확인된다. 다만 제2언어로서의 화자 수까지 포함되면 그 수는 확연히 증가한다.] 참고로 [[도호쿠벤]]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아이누어가 과거 조몬계 언어의 직계, 또는 가까운 친족 언어란 것은 역사적으로 명확하다. 도래인의 진출이 비교적 늦어진 도호쿠 지역의 경우, 조몬계 언어가 시기상으로 중세 초까지 사용되었고 이들 언어에서 차용된 일본어의 몇몇 어휘들이 현대 아이누어 어휘와 비슷하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 당시 조몬계 언어와 아이누어의 관계는 중세 한국어와 현대 한국어 관계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차이점이 더 적다고 보면 편하다. 주어-목적어-서술어가 기본인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완전한 포합어 성격을 띄는 고전 시기의 조몬어보다는 분석적 언어의 특성도 띄는 것이 차이점이다.] [[https://en.unesco.org/courier/numero-especial-octubre-2009/saga-ainu-language|더 나아가서 조몬계 언어와 아이누어의 직속 관계를 여러 학자들의 중론을 빌어 [[유네스코]]에서 공인한 바 있다.]] || [youtube(aT8bgE-XlyE)] || || 세월을 거치며 일본어족이 열도 내에서 확장되는 과정 || || [youtube(lXQeMkMGz-A)] || || 이와 반대로 조몬계 언어와 그 직계 후손인 아이누어가 패권을 잃고 밀리는 과정 || 일본에서 절대 주류를 차지하는 일본어의 경우 조몬계 언어의 적통인 [[아이누어]]와는 역사 시대에 조금씩 주고받은 어휘 몇몇을 제외하면 기초 어휘, 수식 체계 그리고 문법에 이르기까지 싹 다 완전히 다른 별개의 언어로 분류된다. 아이누어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언어는 계통적으론 고립어이긴 하지만 문법상으론 포합어 체계의 이누이트어나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관계가 더욱 가깝다. 기초 어휘는 다르지만 문법의 유사성의 경우 같은 [[교착어]]에 속하며 형제 언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일본어는 한국어와의 관계가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일본어의 기원은 한반도라는 것이 사실상 학계의 정설이다.(한반도 기원설 안에서도 여러 주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기원한다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알렉산더 보빈]], [[재러드 다이아몬드]],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Beckwith) 등이 있다. [[고사기]]나 [[일본서기]]로 대표되는 [[육국사]]들의 내용을 현대 시각에 맞게 정리해보면 [[혼슈]] 서부와 [[규슈]] 북부 지방에서 퍼지기 시작한 도래계 [[야마토 민족]]이 늦어도 4세기경에는 자체적인 정체성을 정의내렸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확인되는 공통적인 중론이다. 오히려 너무 경도되어 [[임나일본부설]]이란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할 정도로 일본인에게 있어서 야마토의 정체성이란 상당한 편이다. 한국인으로 치면 [[고조선]]과 [[삼국시대]]에 필적할 정도.[* 고조선도 [[단군왕검]]을 비롯한 건국 신화나 '기원 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부분은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할로서만 수긍하지 실제 사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암묵적으론 다 알고 있다. 다만 고조선이란 고대 국가의 실체와 베이스가 되는 문명권(현재 학계에서는 기원전 5~4세기 경, 요동의 정가와자 문화를 고조선을 비롯한 한민족 문명의 근간으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높게 봤을때는 기원전 9세기 경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근간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이 실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디테일한 접근과 특정적인 사료가 충분치 않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랬으니 대략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에만 머물 수 밖에 없다. 혐한 성향이 짙은 인터넷 이용자 중에는 [[조몬인]]에 대해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조몬인을 밀어내고 일본 열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야요이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계통이라는 것이 분명하기에 일본인들의 민족주의와 더불어 현대적인 한일 관계에서 비롯된 인지부조화가 오기 때문이다. 조몬인은 [[아이누]]인의 직계 조상(기껏해야 약간의 혼혈 정도일뿐)이지 절대로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거나 문명, 문화 정체성의 근본이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인을 '''미개한 토인'''[* 토인(土人)은 문명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에 토착하여 사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이고 '''인간의 덜 진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며 차별했던 근대까지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제 와서 부랴부랴 조몬인을 찬양하는 건 너무 속내가 보이는 모습이다. 심지어 아이누인이 조몬인의 직계 후손이라는 역사적, 과학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