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육군사관학교 (문단 편집) === 조선인(한국인) === 일본 육사는 [[1874년]] 개교하였는데 [[1883년]] 박유굉(사관생도 11기)이 그 예비코스인 육군 '유년생도', [[1886년]] '사관생도'로 진학한 이래 [[1945년]]까지 60년간 조선인 114명을 배출 하였다. 여기에 [[1940년대]] 전반에 2년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초급장교 3명과 4년제 [[만주국육군관학교]](신경) 예과 졸업자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24명을 추가하면 모두 141명에 달한다. 다만 만주군에서 위탁 교육으로 들어온 편입생들은 일본육사 예과 수료생들과 교류가 없었다. 이는 일본 육사 총 졸업생 5만2천명 에 비하면 약 0.27% 가량. 이들은 크게 초기 - [[조선시대]] 말기 관비유학생들 중기 -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육사 26기, 27기로 넘어간 [[육군무관학교]] 출신들 말기 - 그리고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의 아들/사위 세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다만 중기와 말기 사이에 [[왕공족]]과 그 어학우([[조선귀족]]) 등 6명이 입교 했었으며, 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이러한 흐름과는 별개로 입교 하였다. '''<초기 - 관비 유학생>''' 관비 유학은 관비 유학인데 박유굉 처럼 조선의 지원이 끊겨 구걸하다 시피 하며 살거나, 강제 귀국 후 사형당한 경우 있다. 이 당시의 조선인 육사 출신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복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러일전쟁]] 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자 군내 요직에 대거 진출 한다. 하지만 군대 해산([[1907년]])으로 대부분 강제 전역 당하고 한일합방([[1910년]])으로 예우상 일본군의 고위직 계급을 받거나,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 왕공족의 무관으로 오랜기간 복무하여 일본군 고위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교 하고 나서 조선이 망해 일본군이 된 중기, 처음부터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육사에 입교한 말기 조선인 생도와는 차이점. 다만 노백린, 이갑, 유동열 등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군동에 헌신 하였다. -사관생도 11기- [[박영효]]가 수신사로 도일할때 수행원으로 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 [[후쿠자와 유키치]]가 도쿄에 만든 사립 학교로 현대의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전신. 구한말에 조선인 유학생 수백명이 도일하였는데 상당수가 게이오의숙에서 1년 가량 일본어와 기초학과에 해당하는 '보통학'을 공부했다.]에서 일어를 속성으로 공부했다. [[1883년]] 1월 유년생도로 입교, [[1886년]] 사관 생도로 승격. * 박유굉: 본국의 탄압으로 졸업 1년을 앞두고 [[자살]](1888년 5월 27일). (사관생도 11기 다음 기수부터 사관후보생 1기로 개편됨) -사관후보생 7기?- 무과출신으로 의화군([[의친왕]])의 수행원으로 도일. 1895년 5월 육사 입교, 1896년 3월 10일 수학증서 받음. 이 시기는 [[청일전쟁]]으로 수학연한이 단축되어 기수가 불분명함. 7기와 8기는 귀국후 주로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 * [[이병무]]: 군부 대신, 일본군 중장 대우, [[조선귀족]] 자작 -8기?- 1896년 한국의 육군장교 6명(부위 2명, 참위4명)과 관비유학생 4+1명 입교. 장교들은 [[아관파천]]으로 인한 정세 혼란으로 전원 회국 명령. 관비 유학생은 1895년 게이오 의숙을 거침. +1에 해당하는 이희두는 군출신이긴 하나 장교는 아니어서 회국 명령은 안받아 관비유학생들과 함께 졸업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연표에는 아래 11명이 최초 조선인 입교생이라고 하지만, 이들 전에 박유굉, 이병무가 있었음. 기수 불분명. 1907년 군대 해산기준 군부대신 이병무, 연성학교장 이희두, 무관학교장 조성근. *성창기: [[대한제국군]] 참령 *[[조성근]]: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중장,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 *권태한: 대한제국군 부령 *[[왕유식]]: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소장 *이대규: 대한제국군 참령 *김상열 *박장화: 대한제국군 복무 *장명근 *최병태 *박희병: 중퇴 후 도미. *[[이희두]]: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소장 -11기-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유학생중 21명이 게이오 의숙, 세이조 학교를 거쳐[* 일본 중앙유년학교와 동격의 학교로 명성이 높음. 1885년에 창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세이조학교 또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자만 육사에 갈 수 있었다. 1897년에야 육군보충조례에 의해 5년제 심상중학교 출신자도 육사 입교 가능] 1898년 12월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졸업은 했는데 본국의 지원이 끊겨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 겨우 '참위'계급을 받았으며, 사정사정해 겨우 귀국 했지만 일심회 사건으로 다수가 처형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는 등 어렵게 살았다. * 강용희 : 대한제국군 정위 * 권승록 :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중좌 * 권호선 : 대한제국군 참위 * 김관현 :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 * 김교선 :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 * 김규복 : 대한제국군 참위 * 김상설 : 대한제국군 부위, 경무청 경무관, 중추원 참의 * 김성은 : 대한제국군 부령 * 김형섭 :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대좌 * 김홍남 : 대한제국군 정위 * 김홍진 : 대한제국군 참위 * 김희선 : 대한제국군 정위, [[임시정부]] 군무차장 * [[노백린]] : 대한제국군 정령, 임시정부 국무 총리 및 초대 군무총장 * 방영주 : 대한제국군 참령 * [[어담]] :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 * 윤치성 : 대한제국군 부령 * 이기옥 : 대한제국군 정위 * 임재덕 : 대한제국군 참령 * 장인근 : 대한제국군 정위 * 장호익 : 대한제국군 참위 * 조택현 : 대한제국군 참위 -15기- 대한제국 정부의 국비생 혹은 사비생으로 도일한 유학생 8명이 세이조학교를 거쳐 1902년 12월 육사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육사 졸업후 도쿄 근위사단에서 견습사관 생활 할 때 [[러일전쟁]]이 터져 일본군 부대를 따라 관전장교 자격으로 전선 시찰함. 이러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사실상 일본이 장악하자 그들의 지원으로 근대 교육을 받지 않은 무관들이 대거 군직을 떠나고 육사 15기 등이 요직에 등용됨.(11기중 일부 망명한 자들도 이때 귀국.) 특히 [[육군무관학교]], 연성학교(구식장교 재훈련기관), 유년학교(무관학교의 예과과정에 해당) 등 3대 군사교육기관을 장악했다인데, 고작 2년 후 군대해산. 군대 해산후에는 1931년까지 '헛총 메고 빈 대궐 지키던' 1개 대대 규모의 '조선보병대'의 고위대원으로 남거나, '조선군사령부부'라는 이름으로 왕공족부무관이 되었다. 아래 일본군 대좌 어쩌구는 일본군으로 전공을 세워 받은게 아니라 수십년간 조선 왕공족의 무관을 하며 받은 계급. 이중에서 독립군인 유동열은 육사출신 독립군의 대부로 해방 후 국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한 3인 중 하나.[* 다른 2명은 육사 26기 [[이응준]] 대좌, [[만주군]] [[원용덕]] 중교.] * 김기원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 * [[김응선]]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 남기창 : 대한제국군 참령 * [[유동열]] :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및 군무총장, 미군정 통위부장 * 박두영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중추원 참의 * 박영철 : 대한제국군 참령, 중추원 참의 * 이갑 : 대한제국군 참령, 독립군 * 전영헌 : 대한제국군 부령 '''<중기 - 대한제국의 유복자들>''' 여기서부터는 일본 육사로 넘어간 후 대한제국이 망하는 바람에, 대한제국군이 되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생활하게 된다. 대부분이 3년제 [[육군무관학교]] 재학중 1909년 폐교되어 도쿄중앙유년학교로 편입되었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일본 육사로 진학하게 된 케이스이다. 이후 1933년까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육사의 문호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조선 [[왕공족]]이나 그들의 어학우로 [[조선귀족]] 등 극소수가 개별적으로 입학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위까지만 근무하며 군사기술을 익힌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은 김광서, 이청천, 조철호, 이종혁, 이동훈 등 5명이다. 나머지중 반절은 1925년 대규모 군비축소 때 군대를 떠났으며, 해방 당시 군직에 있던 사람은 10명 내외로 홍사익/영친왕은 중장, 유승렬/이응준/김석원 등 3인은 대좌, 나머지는 중좌에 그쳤다.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육사 졸업 8년 안으로 3년제인 [[육군대학교]](이하 육대)에 진학해야 하는데 왕공족 3총사 외에는 홍사익만 육대에 갈수 있었다. 홍사익은 학구파로 원래 성적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어차피 성적도 좋은거 그냥 영친왕 이은의 어학우 삼아 입학 허가가 났다는게 다수설이다. "일본군 장교라도 전원 친일파는 아니다. 독립운동 한 사람도 있다"는 주장은 이 시절 육사생을 뜻한다. 이들 대부분이 대한제국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나라가 망해 어쩔 수 없어 일본육사로 진학한 경우였다. -23기- 대한제국의 황실 장학생으로 1909년 12월 입교, 1911년 5월 졸업. * [[김경천]] : 일본군 중위, [[독립군]] -26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2학년 생도 18명이, 1909년 일본 육군유년학교 3학년에 입교. 1912년 12월 육사 진학. 13명이 1914년 5월에 졸업 또한 후배인 27기를 합쳐서 유학생 총 10명이 한국 병합 반대, 질병, 성적 불량등으로 중퇴함. 육사 26기~27기 생도들은 처지가 같아 사이가 매우 돈독했는데, '전의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었고 그 회장에는 선배인 김경천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중위를 달면 다 같이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은 김경천과, 26기에는 지청천, 조철호, 27기에서는 이동훈, 이종혁뿐이다. 이후 이응준 등은 국군의 산파역을 하였고, 김준원, 신태영, 유승렬, 이대영등이 국군에 뛰어 들었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이 딸려 6.25때는 대부분 2선에 있었다. * 권영한 : 일본군 중위 * 김준원 : 일본군 대위, 육군 준장. 김기원(15기)의 동생이자 김정렬(54기)의 아버지. * 민덕호 : 일본군 중위 * 박승훈 : 일본군 소좌, 만주군 상교, 육군 소장 * [[신태영]] : 일본군 중좌, 육군중장, 3대육군총참모장, 4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 * 안병범 : 일본군 대좌, 육군 준장(추서) * 염창섭 : 일본군 중위 * [[유승렬]] :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 * 이대영 : 일본군 소좌, 육군 준장 * [[이응준]] : 일본군 대좌, 육군 중장,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총참모장]] * [[지청천]] : 일본군 중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 조철호 : 일본군 중위, [[6.10 만세운동]] 중 체포 * [[홍사익]]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B급 전범으로 교수형 -27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1학년 생도 25명이, 1909년 도쿄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 1913년 12월 육사 진학. 20명이 1915년 5월에 졸업 * [[김석원]] :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 * 김인욱 : 일본군 중좌 * 김종식 : 일본군 대위 * 김중규 : 일본군 중위 * 남우현 : 일본군 중좌 * 박창하 : 일본군 대위 * 백홍석 : 일본군 중좌, 육군 소장 * 서정필 : 일본군 중위 * 원용국 : 일본군 대위 * 유관희 :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 * 윤상필 : 일본군 소좌 * 이강우 : 일본군 중좌 * 이동훈 : 일본군 소위, [[3.1 운동]]중 물고문으로 사망, 건국훈장(애족장) * 이동혁 : 일본군 중위, 독립군 * 이희겸 : 일본군 중위 * 장기형 : 일본군 중위 * 장석윤 : 일본군 중위, 육군 대령 * 장성식 : 일본군 중위 * 장유근 : 일본군 중위 * 정훈 : 일본군 중좌 -29기- 영친왕은 1907년 일본의 학습원,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11월 육사 입교, 1917년 5월 졸업. 어학우로 이완용 내각의 대신 조중응의 아들 조대호와 본인의 외사촌 엄주명이 따라갔다. 다만 후자는 중앙유년학교 시절 신병으로 1년 휴학. * [[영친왕]] 이은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 조대호 : 일본군 소위, [[조선귀족]] 자작 -30기- * 엄주명 : 일본군 중위, 한국군 준장 -42기- [[의친왕]]의 장남 이건 역시 일본의 학습원과 토쿄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26년 4월에 육사 입교, 1930년 7월 졸업 * [[모모야마 켄이치]] 이건 : 일본군 중좌, 육군대학교 51기, 일본에 귀화 -45기- [[의친왕]]의 차남 이우는 운현궁 호주권 상속으로 [[왕공족]]이 됨. 역시 학습원과 도쿄유년학교를 거쳐 1929년 4월 육사에 입교, 1933년 7월 졸업. 다만 44기로 입교한 이형석은 신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로 졸업 이형석은 이시기에 특이 케이스인데 본인 말로는 "본격적인 조선인 입교를 압두고 시범적으로 나를 선정한게 아닌가 싶다"고 증언하였다. * [[이우]] : 일본군 대좌(추서), 육군대학교 54기, 원폭으로 전사 * 이형석 : 일본군 소좌, 육군 소장 '''<말기 - 조선인 입교 가능>''' [[만주사변]]이 일어난지 2년 후 부터 일본측의 입장이 바뀌어 조선에 있는 일본인중학교에 다니던 극소수의 조선 학생들에게 학교장과 배속 장교들이 간절히 권유하여 그 중 일부가 육사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4학년 1학기를 마치면 입학자격이 부여되었고, 이후 조선인들이 다니던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도 간간히 보인다. 처음에는 매년 2~3명씩 입학하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1942년)에 6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들은 선배인 육사 26기~27기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33명중 3명만 기병. 나머지는 전원 보병], 만약 독립이 되면 우리나라 군대에 신기술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이 기술병과를 선택 하였다. 초기, 중기에 대한제국에서 유학온 생도들과 달리 이들은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일본육사에 온 순수한 친일파. 이들은 조선말 조차 잘 하지 못하여, 해방후 육사에서 일본어를 섞어 강의했다거나, 명령을 내리는데 발음이 부정확해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장차 독립된 조국의 군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술병과를 지원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청년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첫 기수인 49기의 채병덕과 이종찬은 영친왕 이은의 후원으로 일요일에 외출하여 쉴 수 있는 하숙을 얻었고, 그 이름을 '계림회'로 등록하여 학교측에 신고 하였다. 이곳은 육사 26기, 27기 선배들이 쓰던 일요 하숙집과 같은 건물이었다. 채병덕과 이종찬 이후 후배들은 모두 계림회원에 속하며 총 45명이다. 이들 중 해방 당시 육사 또는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제 59기, 60기, 61기생을 제외한 선배들은 대다수가 참전 경험이 있으며 전사자도 다수. 해방 후 육사 26기~27기가 국군 창건의 산파 역할을 했다면 6.25를 겪으며 육군과 공군의 최고 간부층을 형성한 것이 이들 육사 말기생들이다.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49기~53기는 소좌, 54기~56기 대위, 57기 중위, 58기는 소위였고 59기~61기는 육사 또는 예과사관학교 재학중 이었다. 일본군 계급 뒤 전사 표기는 물론 일본군으로 전사한 것이며, 국군 계급 뒤 전사는 6.25중 전사. [[추서]]는 전사 후 1[[계급 특진]] 한 경우로 역시 전사자이다. -49기- 1932년 겨울 당시 평양중학교 4학년 채병덕과 조선귀족 [[이하영(1858)]] 자작의 손자이자 경성중학교 학생인 이종찬이 응시 합격하여 이듬해 4월 예과에 입교 하였다. 이후 1937년 6월 졸업. * [[채병덕]]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추서), 초대 국방부 참모총장 및 2대/4대 육군총참모장 * [[이종찬]]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 6대 육군참모총장 -50기- 1934년 4월 입교, 1937년 12월 졸업. 지인태는 1938년 6월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 이용문 : 일본군 소좌, 육군 소장(추서) * 지인태 : 일본군 항공 중위(추서) -52기- 1936년 4월 입교, 1939년 9월 졸업 * 박범집 : 일본군 소좌, 공군 소장(추서), 초대 공군참모부장 * 최명하 : 일본군 항공 중위(추서) -53기- 1937년 4월 입교, 1940년 2월 졸업. * [[신응균]]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 * 박재흥 : 일본군 소좌 -54기- 학제 개편으로 육군사관학교 예과가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바뀌어 패망 때 까지 유지됨 1937년 12월 육군예과사관학교 입교, 1940년 9월 육사 본과 졸업. * 강석호 : 일본군 중위, 전사 * [[김정렬(1917)|김정렬]] : 일본군 항공 대위, 공군 중장, 초대/3대 공군총참모장, 국방부장관 * 노태순: 일본군 중위, 전사 -55기- 1938년 12월 입교, 1941년 7월 졸업. * [[김창규(군인)|김창규]] : 일본군 항공 대위, 공군 중장, 5대 공군참모총장 * [[유재흥]] : 일본군 대위, 육군중장, 3대 연합참모본부총장 * 전원상 : 일본군 항공 대위, 전사. -56기- 1939년 12월 입교, 1942년 12월 졸업 * 김종석 : 일본군 대위, 육군 중령, [[숙군]]으로 사형 * [[이형근]] : 일본군 대위, 육군 대장, 초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연합참모본부총장]], 9대 육군참모총장 * 최정근 : 일본군 항공 소좌([[오키나와 전투]] 중 [[카미카제]]로 2계급 추서) * 최창식 :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 한강교 조기 폭파로 사형 -57기- 1941년 4월 입교, 1944년 4월 졸업. * 김영수 : 일본군 중위, 전사 * 김호량 : 일본군, 육군 소령, 전사 * 정상수 : 일본군, 전사 -58기- 1942년 4월 입교, 1945년 6월 졸업 * [[박원석(군인)|박원석]] : 일본군 항공 소위, 공군 중장, 8대 공군참모총장 * 신상철 : 일본군 항공 소위, 육군 준장, 공군 소장 * 안광수 : 일본군 소위, 육군 대령 * [[정래혁]] : 일본군 소위, 육군 중장, 국회의장 * 최복수 : 일본군 소위, 육군 대령, 전사 * 한용현 : 일본군 소위, 공군 대령 -59기- 1943년 4월 입교, 1944년 10월 본과 진학 * 김재곤 : 패망 직후 일본인 구대장이 사살 * [[장창국]] : 육군 대장, 9대 합동참모의장 * 홍승화 : 행적 불분명(도일?) -60기- 1944년 3월 입교, 1945년 7월 본과 진학 * 김태성 : 육군 대위 * 이성구 : 행적 불명 * 이연수 : 공군 준장 * 이재일 : 서울대 물리학과 * [[장지량]] : 공군 중장, 9대 공군참모총장 * 조병권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 -61기- 1945년 4월 입교. * 김은수 : 감사원 국장 * 김중환 : 행적 불명 * 김차경 : 한국전력회사 근무 * 오일균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 * 정만영 : 한국통신기술연구소장 * 조병하 : 카이스트 이학교수 * 조철형 : 행적 불명 * 최용기 : 도일함 * 성명 미상 1명 : 한인준? <만주 육군군관학교 유학생> [[만주사변]] 당시 만주의 지배자였던 [[장쉐량]]이 [[빤스런]] 할 때 버리고 간 6만 병력을 베이스로 삼아 일본은 독립군 토벌 목적의 [[만주군]]을 만들었다. 기존의 만주인 장교들의 보충 교육을 위해 2년제 봉천 군관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일본 육사를 모방하여 4년제 신경 군관학교를 만들었다.(합쳐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문서에 표기) 만주군관학교 입학생 T/O를 반띵하여 일본계 반, 만주계(대만, 조선인 포함) 반으로 구성하였다. 일본계는 일본 육사 시험에서 아깝게 떨어진 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까지 간거고, 조선인은 대체로 한반도 북쪽에 살던 고등보통학교 출신자들이었다. 2년제 봉천 군관학교 출신 3명(김석봉, 석희봉,정일권)은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한체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것이며, 4년제인 신경 군관학교 출신자의 경우 2년 교육 후 일본인 전원과 만주계 중 우수 학생들은 일본육사 본과에 유학생대 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유학생들은 제복에 '만'자 표지가 있었고, 육사생도와 섞이지 않은채 자신들끼리만 교육 받고 성적도 따로 매겼다. 그리고 신경학교 5기생 부터는 조선인들은 일본계로 인정 받아 전원 일본 육사로 유학갈 자격을 얻었다. 일본 육사 재학기간이 엿가락 처럼 변경되는 시절이라(1년10개월~1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기수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만주 유학생 출신은 총 27명. 졸업 후에는 물론 만주국으로 돌아가 만주군이 되며, [[관동군]] 산하의 일본군들이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꼭두각시 군대였다. 장점이라면 일제 패망후에 소련군이 관동군을 시베리아로 끌고 갔지만, 만주군은 군대 취급도 안하여서 그냥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서 2년 유학했음에도 일본육사계열로 분류되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만주군계이다.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은 만주계, 일본육사계, 학병계라는 3대 파벌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정일권과 백선엽이 수장격.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오랜 기간 정부와 군의 권력을 장악한다. 단적인 예로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이주일이 부의장, 박임항, 박원석, 최주종, 김윤근이 위원이다. 반면에 순수 일본 육사 출신의 최고위원은 정래혁만 있다뿐. 말기의 일본육사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자의에 의해 일제에 부역한 빼도박도 못할 [[친일파]]. 그중에서 일부는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악명높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다. -54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 졸업 후 만주군으로 임관한 다음 1939년 3월 육사 본과 편입 * [[김석범]] : 만주군 상위, 간도특설대, 해병대 중장, 2대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 석희봉 : 간도특설대, 사망 -55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생이나 만주군 기병학교를 거치느라 1년 늦은 1940년 4월에 육사 본과 편입 * [[정일권]] : 만주군 상위, 육군 대장, 5/8대 육군참모총장, 2대 연합참모본부총장 -56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1기 예과 수료, 1941년 8월 본과에 편입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11명 중 무려 6명이나 성적 우수로 일본 육사에 올 수 있었다. * 김민규 : 육군 대위 * [[박임항]]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 [[이주일(군인)|이주일]]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 조영원 : 사망 * 최창언 : 육군 중장 * [[최창륜]] : 만주군 항공장교, 인민군 보병공급 부장, 육군 대령, 전사 -57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2기, 1942년 10월 본과 편입 * 김재풍 : 행적 불명 * [[박정희]]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5대~9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 이섭준 : 부산해운사장 * [[이한림]]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58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3기, 1944년 5월 본과 편입 * 강태민 : 육군 준장 * 최주종 : 만주군 중위, 육군 소장 -59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5기, 1944년 10월 본과 편입. 이 기수부터 일본계로 인정 받아 5명 전원 일본 육사 편입했음. * [[강문봉]] : 육군 중장 * 김태종 : 행적 불명 * 이용술 : 행적 불명 * 황택림 : 육군 대위, 숙군으로 사형 * 이00 : 행적 불명 -60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6기. 9명 중 7명 1945년 7월 본과 편입. 한달 후 일본 패망. * 김기준 : 사망 * 김석권 : 사망 * 김세현 : 육군 중위 * [[김윤근]] : 해병 중장 * 김학림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당한 * 이우춘 : 사망 * 정정순 : 육군 중령, 전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