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회당(1945년) (문단 편집) === [[가타야마 내각]] ~ 분열 === 전후 [[일본국 헌법|새 헌법]]에 의해 치러진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 사회당은 [[일본민주당(1947년)|민주당]]과 국민협동당 양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 연립정권 형성을 주도한 것은 이미 앞서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의 협력을 구상한 우파였으나, 민주당과의 연정 성립을 위해 대장상을 내주는 등 지대한 양보를 했으며, 그간 사회당이 내세웠던 개혁 정책들도 대대적으로 축소되는 등 혁신성이 크게 퇴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좌파는 공산당과의 절연 선언을 요구받으면서 사상검증까지 당하였다. 더군다나 히라노 리키조 농림대신이 전전 황도회 활동을 빌미로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여 사회혁신당을 창당하는가 하면, 반대로 좌파에서도 구로다 도시오를 위시로 하는 친중파가 제명되고 나중에 노농당을 창당하게 된다. 거기다 히라노의 추방으로 공석이 된 농림상의 후임을 놓고 좌파와 우파와 민주당이 서로 싸우는 등, 가타야마 내각에는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1948년]] 2월에 가타야마 내각이 제출한 공공요금 인상안을 좌파가 [[날치기]]로 상정하여 부결시키자, 가타야마 내각은 막다른 길로 내몰려 실각하기에 이른다. 가까스로 사회당-민주당 연립은 유지됐으나 총리가 민주당에게 돌아가면서 아시다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아시다 내각이 곧 [[쇼와전공사건]]에 휘말려 아시다 본인은 구속되고 또 사회당 우파의 수장이며 당시 내각의 부총리였던 니시오 스에히로까지 연루되는 미증유의 정치위기가 닥쳐왔다. 아시다 내각의 붕괴 후 1949년 1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불과 48석만 건지며 대패했으며, 특히 우파에서는 총리였던 가타야마와 부총리 니시오, 좌파에서는 노동대신 가토 간쥬 등 가타야마-아시다 내각에 입각했던 거물들이 전부 낙선하는 등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 대패로 전후 세대가 본격적으로 당 조직에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고, 이는 풀뿌리 활동가 집단에 기반을 두었던 좌파가 비록 함께 심판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 당내 세력을 급격하게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반면에 사회당 우파는 자신들이 주도했으나 실패작으로 끝난 가타야마-아시다 내각, 니시오의 정치 스캔들 연루, 그리고 선거참패의 책임까지 짊어지면서 당내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달라진 좌파와 우파의 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총선 직후인 4월에 열린 제4회 당대회이다. 일명 [[https://ja.wikipedia.org/wiki/%E6%A3%AE%E6%88%B8%E3%83%BB%E7%A8%B2%E6%9D%91%E8%AB%96%E4%BA%89|모리토·이나무라 논쟁]][* 사회당 좌파였던 모리토 타츠오와 사회당 우파였던 이나무라 쥰조를 따왔다.]으로 당 노선에 대한 격렬한 토론 끝에 좌파와 우파의 노선을 적절히 융합한 타협안이 채택되었으나, 불과 2년 전 우파에 의해 사상 검증을 강요당하던 좌파가 이제는 우파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이르면 갈등의 골은 당의 뿌리 조직으로도 번져서, 좌파가 사회당 청년부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외연 확장에 나서는 것에 반발한 우파가 전전 공산당 전향자들이 조직한 이른바 독립청년동맹이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삼아 좌파에 대항하기에 이르른다. 급기야 1950년 1월에 열린 제5회 당대회에서는 사회당 청년부가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아직까지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가타야마를 상대로 불신임을 선언하고, 독청 가담자들을 제명하라는 결의를 발표한다. 이 요구를 받은 가타야마는 당대회 도중 대회장을 박차고 나와 우파끼리만 모여 다시 당대회를 열었고, 스즈키의 좌파와 아사누마의 중간파는 우파 당대회를 인정하지 않고 스즈키를 서기장을 선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6월의 참의원 선거 문제로 부득이 통일대회를 다시 열어 일시적으로 우파가 당에 복귀하고 스즈키를 아사누마로 교체하는 타협이 있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교체당한 스즈키도 곧 위원장에 선출되어 당내 좌파 우위를 완전히 굳혔다. 또한 지금까지 우파가 기반으로 삼았던 비공산당 계열 노동조합연맹, 즉 총동맹이 독청문제로 아수라장이 된 것을 이용하여 좌파가 그 주도권을 탈취했고, 이윽고 이들은 공산당 계열의 노동조합연맹인 산별회의를 탈퇴한 이른바 민동파와 결탁하여 총평을 결성함으로서 일거에 일본 노동조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반대로 우파는 자신들의 기반이 위축되면서 운동 내의 비주류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위원장은 좌파, 서기장은 중간파, 의원들은 우파, 하지만 기반 조직은 좌파가 장악한 아슬아슬한 분열상에 재차 불이 붙은 것은 1951년 9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강화조약]]에 소련과 중국이 불참하고 또 [[미일안전보장조약|안보조약]]이라는 것이 부록으로 딸려오면서 여기에 대한 가부를 놓고 다시 당이 갈라지게 된다. 좌파는 소련과 중국이 없는 강화조약과 일본의 비무장 중립을 위협하는 안보조약에 모두 반대했고, 우파는 두 조약에 모두 찬성했다. 여기에 중간파가 강화조약에는 찬성, 안보조약에는 반대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자, 우파가 찬성하면서 중앙위원회에서는 통과됐으나, 이 결과에 반발한 좌파가 당대회를 소집해 부결시키고자 했다. 대회 도중 우파와 중간파는 아사누마 서기장을 중심으로 이미 중앙위원회를 통과한 타협안을 집행하겠다며 원내 의원 다수를 이끌고 대회장을 나갔고, 좌파는 스즈키 위원장을 중심으로 중앙위원회의 타협안을 부결시킨 후 무효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좌파와 중간파가 당대회를 지키고 우파가 떨어져 나간 1950년의 분열극과는 달리 이번에는 좌파만이 당을 지키고 중간파와 우파가 함께 나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분열이 이른바 [[좌파사회당]]과 [[우파사회당]]의 시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