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회당(1945년) (문단 편집) === 초기 === [[파일:25232.png|width=100%]]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전전의 무산운동세력이 단결해 결성하였다. 제도권 유일의 무산정당이었던 [[사회대중당(일본)|사회대중당]]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전전 일본의 무산운동은 오늘날의 좌우 개념과는 궤가 다른 담론이었기에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합류했다. 전전 [[사회대중당(일본)|사회대중당]] 내에는 이념과 출신에 따라 여러 조류가 존재했다.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부르짖던 [[스즈키 모사부로]]와 [[가토 간쥬]]에 동조하는 풀뿌리활동가 집단이 좌파로 있었고, [[니시오 스에히로]] 등 노조 운동가들이 결집된 우파가 있었으며, 또 이렇게 갈라진 무산운동의 통일을 부르짖던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 지식인 계층이 주도한 중간파가 있었다. 그리고 사대당 밖으로 나가면, 정권에서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돼 추방당했던 히라노 리키조 주변의 농민운동 집단이 있었고, 또 나카노 세이고가 이끌었던 반체제 파시스트 혁신운동인 동방회가 있었다. 여기서 사대당 좌파는 정부의 탄압을 받다가 1937년 [[인민전선]]사건으로 일망타진되었고, 사대당 우파는 40년의 반군 연설 사건에서 의회주의를 고수했다가 중간파에 의해 당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산업보국회의 성립으로 지지 기반인 노조가 힘을 상실하자 같은 시기 농민운동이 체제에 의해 흡수당하면서 비슷한 곤경을 겪던 황도회 세력과 함께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의회 내 보수파 그룹에 합류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고노에 후미마로]]에 동조해 전체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대당 중간파는 그 후광을 받아 일시적으로 [[대정익찬회]]에서 승승장구했으나, 고노에가 쇠락하면서 함께 망하여 42년 총선에서는 공천도 받을 수 없게 됐고, 비슷한 처지인 동방회는 그 수괴인 나카노 세이고가 자살을 강요받는 사태를 맞았다. 전후 이들 집단은 제각기 무산운동의 대동단결을 부르짖으며 잇따라 통일무산정당의 창당을 시도한다. 좌파는 혁신화족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요시치카를 당대표로 하는 이른바 "국민협회"라는 것을 구상했고, 중간파도 혁신화족이었으며 구 대정익찬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아리마 요리야스나 전전 혁신파의 아이콘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등의 추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종전 직후 가장 목소리가 컸던 집단은 하토야마 그룹에 가담했던 우파/황도회 집단이었다. 니시오, 히라노, 여기에 미즈타니 조자부로[* 1920년대에는 좌파에 공명하였으나, 1930년을 기점으로 중간파와 협력해 무산운동의 통일을 주장했고, 이후에는 우파에 가담했다.]를 더한 3인 그룹은 전시의 하토야마 그룹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하토야마를 영수로 모시고 무산운동과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을 규합한 [[빅텐트]] 중도정당을 창당코자 했으나, 하토야마의 측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하토야마 본인의 의향도 [[자유당(일본)|보수정당]]의 창당으로 기울자 3인 그룹도 무산운동을 결집시키는 것으로 선회했다. 한편, 좌파가 모시려고 했던 도쿠가와는 본인이 고사했고, 중간파가 모시려던 아리마는 좌파와 우파가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기시는 [[전범]]으로 체포돼 버렸다. 이렇듯 각 정파들의 구상들이 전부 좌절되면서 어느 일파도 신당을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좌파가 당대표로 밀었던 도쿠가와와 중간파가 당대표로 밀었던 아리마/기시의 취임이 전부 좌절된 후 누가 당대표가 될 것인지 합의를 보지 못헀고, 급기야 사회당의 창당대회에서는 당대표에 해당하는 당 위원장직을 공석으로 남기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비록 우파의 3인 그룹이 이른바 "창당 3인"이라고 하여 사회당의 창당 과정을 지도하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타 정파들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무산운동 대동단결이라는 명분으로 포용하면서 제각기의 입장과 지분을 보장해주어야만 했다. 위원장 공석자리에 우파 인물이었던 [[가타야마 데쓰]]가 뒤늦게 취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조율의 결과였다. 그런데 앞서서 보았듯 이 정파들은 무산운동이라는 담론에 묶였을 뿐 서로 지향점도 다르고 출신도 달랐기에, 지분을 보장해주지 못할 경우 단일대오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폭탄은 가타야마 내각에서 가장 극적으로 터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