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포로 (문단 편집) === 포로들의 대우 === '''만약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산 채로 금니가 뽑히거나 죽을만큼 구타당하지 않고 무사히 후속부대에 인계된다면'''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는 미드 퍼시픽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오키나와에서 육군이 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보고 '우리(해병대)는 포로 안 잡는줄 알았는데?' 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포로들을 사살하려고도 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 [[오키나와 전투]] 이전까지는 일본군 포로를 잡더라도 난전중에 후속부대에 인계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지휘관의 감시가 느슨할 때 몰래 쏴죽이는 일이 빈번했고 애초에 당시 미군에게는 일본군의 포로학대 만행에 대한 복수와 분노로 인해 암묵적으로 포로를 받지 않는 관습이 있었고 때문에 설사 항복하는 일본군이 있더라도 무시하고 사살했다는 기록이 쏟아져나온다. 이로 인해 일본군 포로 수는 독일군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잡힌 이들, 하급자와(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포로 학대를 했던 놈들은 '''[[정의구현|고생 끝, 지옥 시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9px-Bathing_japanese.jpg]] [[미합중국 해군]] [[전함]] [[아이오와급 전함|USS 뉴저지]]의 갑판에서 씻고 있는 [[일본 해군]] 포로. 해전 특성상 포로들의 대다수가 바닷물에 젖은 채로 포획되다보니 [[저체온증]]으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씻기고 봤다. 당시 미 해군은 일본군 포로를 포획하면 착용한 피복을 모두 벗긴 뒤 씻기고 함내 재고품인 새 [[샘브레이]]와 [[당가리]]를 지급하였다. 어차피 막 입는 작업복이라서 비싼 옷도 아니고 포로들에게 부담없이 입혀줄 수 있기 때문. 포로가 입고 있던 피복은 아예 못 입을 만큼 걸레짝이 된 옷이 아니라면 세탁 및 정비를 거쳐 돌려줬다. 일본군의 포로 생활에 대한 비공식적인 사료로서 활용할 만한 오오카 쇼헤이의 자전적 소설인 '포로기'에서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 포로생활 중에는 장교와 사병을 완전히 분리 수용 했기 때문에 서로 볼 일이 없었다. 다만 병과 하사관은 같이 수용 되었는데 포로 끼리는 계급으로 대우 하지 않고, 그보다는 먼저 수용된 포로가 권력을 차지 하였다. 주인공이 있던 제1수용소 대표를 맞은 이마모토는 상등병이었고, 각 중대장들은 하사관들이기는 하지만 이는 계급 때문이 아니라, 해군들이라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기도 전에 해전을 통해 포로가 되어 먼저 수용소로 왔기 때문이다. 즉 동시에 수용되면 하사관을 우대 하였지만, 그 보다는 먼저 수용된 사람이 '짱'이었다. 반면에 장교 포로들인 <어느 하급장교가 본 일본 제국 육군>(태평양 전선)이나 <불모지대>(관동군)의 경우 일본군 계급이 그대로 통용 되었다. * 포로생활은 매우 윤택했다고 한다. 밥은 많이 주는데 노동은 별로 시키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이 좋은 생활이 끝났다며 한탄하는 포로도 많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런 포로들의 모습(아무 생각없이 먹고 싸고 놀고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짐승같았다고 표현한다. * 집단 자살을 일삼는 일본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미군에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일본군도 많았다. 그러나 거의 전원이 부상으로 인해 포획된거라고 뻥을 친다. * 포로 수용소에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수용소의 남자들은 [[비역|곱상하고 젊은 남자를 여자로 분장시켜 놀고 동성애도 즐겼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비역을 포로 수용소 타락의 시작으로 보며 개탄한다. * 징용으로 끌려온 대만인은 갈등을 우려하여 일본인과 별도로 수용하였는데 일본이 졌다는 소식에 대만인 포로는 일본인에게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 영어가 좀 되는 주인공은 미군들과 얘기를 많이 했는데, 미군 중 하나가 '여군은 장교들 장난감일 뿐이지'라고 말하자 주인공은 미군에게 실망한다. 교토대 출신의 불문학 전공자, 번역가, 기자로서 지금까지 책으로만 접했던 서구의 여성인권이 기대치에 못미쳤기 때문. 비슷한 예로서, 주인공은 흑인 미군을 생전 처음 접하면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저들(서양인)도 동양인의 무표정함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걸 떠올리면서, 역지사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반성한다. 저자가 일본군1에 해당하는 평범한 포로가 아니라 당대 일본군에서는 드문, 인텔리 계층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인 등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주민들도 다수 포로로 잡혔고, 전쟁법상 하와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일본군의 징용생활이 워낙 지옥 같았던지라 포로 신세긴 해도 그 전과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한국인 등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주민들도 다수 포로로 잡혔고, 전쟁법상 하와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일본군의 징용생활이 워낙 지옥 같았던지라 포로 신세긴 해도 그 전과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는 일본군이 같은 부대 병사라도 조선인 병사에게 우선적으로 궂은 일을 시키고, 배식도 덜 주는등 2등 시민인 이들을 매우 차별하고 학대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한국인 포로들과 일본인 포로들이 패싸움까지 했고, 처음에 이들을 한 곳에 모아 수용했던 미군은 이 두 집단을 따로 수용하기도 했다. 대체로 적당히 일하고 돈을 받는 등 징용 시절엔 꿈도 못 꿀 혜택을 누렸고 건강 상태 등 모든 생활이 매우 나아졌다. 참고로 이 한인 일본군들은 대부분이 [[조선지원병]]이였는데 해당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초졸이하의 저학력, 농어촌 출신의 청년들이였고 일본에 대한 소속감이라던가 충성심도 없었다. 그나마도 장남이 아니라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기대할수 없었던 차남, 삼남들이 일본 경찰 및 주변의 직간접적인 강압 때문에 어쩔수 없이 입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기 또한 높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학력이라도 말이 저학력이지 조선지원병 모집 최소 조건이 일본어 독해와 작문 그리고 소학교 졸업(이 조건은 나중에 완화된다.)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아주 무식쟁이들은 선발되지 않았고, 이들은 해방 및 한국전쟁이후 지역유지 수준은 되는 사람들로 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잘 해줬으면 일본이 전후에 그렇게 욕 먹지 않았을텐데 이들마저도 아주 무시하고 차별했기 때문에 전후에 일본에 대한 이 조선지원병들의 감정이 아주 좋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 미군이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을 같이 수용했을 때 패싸움까지 벌이는 등 전우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남남이라는 의식이 확고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일본군의 학대로 원한이 쌓여있던지라 자신들도 연합군으로 참전하겠다고 자원했지만 [[제네바 협약]]에 위배되는 일이라 무산되었다. 제네바 협약에서는 포로를 군사적인 일에 동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때문이다. 때문에 후일 한국전쟁 때도 미군은 공산군과 싸우겠다고 지원한 인민군 포로들을 그냥 다 [[거제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다만 한국군에서는 그런 포로들을 [[현지입대]]시켜 병역자원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군의 경우 자발적으로 항복한 한국군을 '해방군 동무'라고 하며 분대당 한명씩 배치하여 썼다. 이 때 포로수용소에서 미군에게 번 돈으로 해방된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 부자가 된 사람들이 몇 있다. 하지만 정작 일본정부는 이들에게 입대시에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 당시 포로수용소 출신 한인들이 연판장을 만들어 일본정부에 항의했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이 소멸되어 이 분들은 돌아가실때까지 끝끝내 일본정부에게 한 푼도 받지 못 했다. 원래는 한국 정부가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본에게 받은 돈을 나눠줘야 했지만, 자기 멋대로 써버리고 입을 씻어버렸기 때문. 간혹 소수의 포로들은 자신들을 붙잡은 연합국 군인들과 친해진 경우도 있었다. 한 미해군 [[잠수함]]이 일본 해군 조종사 한 명이 해상에서 표류중인 것을 발견하고 구조, [[하와이]]에 포로를 잡았으니 귀항시 인계병력을 보내달라고 보고한 적 있었는데, 이를 보고받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미합중국 해병대|해병]] [[군사경찰|헌병]]들을 입항 예정일에 대기시켰다. 잠수함이 입항하고, [[함장]]에게 헌병 지휘관이 포로를 인계해 달라고 하자 함장이 포로를 데리고 나오라고 시켰는데, 나온 포로가 앞치마와 취사모를 착용하고 식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헌병들이 기겁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 미해군 잠수함들은 승조원 수가 항시 부족해서, 누군가를 구조하면 그가 부상자가 아닐 경우 내릴 때까지 계급고하 관계없이 승조원들의 일을 보조토록 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은인들이 시키는 것인 만큼 대부분 군말없이 따른 편이었다고 한다. [[육군 항공대]] [[중령]]이 구조된 후 몸이 좀 회복되자, 부사관 한 명이 따라오라고 하더니 기관실에서 여러 잡무를 시켰는데, 아무 불만없이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잠수함의 함장은 대개 소령이었는데. 함장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잡무를 시킨 것. 이러한 상황땜에 이 잠수함에선 그 포로에게 [[조리병]] 보조를 맡겼던 것. 승조원들은 '그 포로 밥 잘했는데 아쉽네' 하며 헤어지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잡힌 [[관동군]] 포로들은 얘기가 달랐다. 수많은 포로들이 일본으로 송환되는 줄 알고 탔던 기차는 시베라아행 기차였다. 포로들은 용변과 취식도 힘든 열악한 조건에서 운송되었다. 가다가 멈추고 내려서 취식, 용변을 하는 식. 기차가 떠날 때면 용변 중이라도 올라야 했다. 조금만 지체하면 총살. 여기에 소련 민간인들의 조롱과 약탈까지도 간간이 있었다. 또한 초반에는 일본군 시절의 계급 등도 어느 정도 통해서 군관 출신인 포로가 병사 출신인 포로에게 자신의 짐을 들게 하는 등의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