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포로 (문단 편집) == 다른 군대에서 == 고대 전투에서는 [[칸나이 전투]] 때 로마군 6만명 중 1만+1만(주둔지 경계병)이 포로로 잡힌뒤 그중 로마 시민 8천이 노예로 팔려갔다. 다른 군대들의 경우에는 포위된 상황에서 개죽음이 확실하면 이후 맞이할 결과가 참혹하더라도 대부분 항복을 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포위된 30만의 독일군 중 9만명 정도가 항복했고, 웨이크 섬 전투에서는 600여명의 미군 중 400여명이, 토브룩 함락때는 영국군 110,000명 중 3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심지어 나치의 악랄한 포로학대를 알고있을 [[폴란드]] 시민들도 [[바르샤바 봉기]] 때 시민군 50,000명중 15,000명이 항복했다. 물론 수용소로 직행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당장의 개죽음을 면하기 위해 항복한 것이다. 이렇듯 포위되어 탈출로가 없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잔혹한 처우가 기다려도 적어도 몇 십%의 포로는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리아 내전]]이나 [[이라크 내전]] 때 그 악명높은 IS도 적군의 포위섬멸전 상황에서는 손을 들었다. 외국 지원병을 제외하고는 즉결처분이 유력하다는 거 뻔히 알지만 어차피 싸워도 결말이 뻔하니까.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 항복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기는 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군]]의 군형법도 '''지휘관이 자기 할 바를 다하지 않고 적에게 항복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한다.(군형법 제22조) 또한 '''지휘관이 아닌 군인이 투항을 하면 '적진으로의 도주죄'라고 해서 사형'''에 처한다.(군형법 제33조) 아군이 '''자기 멋대로 아군을 불리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면 패배는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군대라면 설령 항복을 말라고 법에 규정해도 임무를 수행할 수 없고 싸워봤자 득도 없다면,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본국에 돌아와도 기밀 누출 같이 아군에 해가 될 행위를 하지않고, 항복한 것도 완전히 임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었다고 입증하면 군법 위반으로 처벌하기는커녕 참전 용사로 대접한다. 법학 용어로 "[[기대가능성]]이 없다"라고 한다. [[군인]]도 일단 천부인권을 지닌 [[인간]]인 이상 목숨이 누구보다 소중한 가치인건 맞지만, 군인의 경우는 자신을 희생해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임무의 가치를 그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무를 성공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건 군인에게도 기대가능성 없는 행위다. 때문에 한국군도 [[군진수칙]]에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했을 경우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어찌보면 위 군형법과 모순되는 규정을 두고있다. 진주만 공습 후 필리핀에 고립된 미군도 보급이 끊겨 탄약과 식량은 없고 적은 많은 상황을 설명하고 '''상부의 허가받고 항복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안타깝게도 이들의 운명은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총맞고 죽는게 더 나을 상황이었긴 하지만]]) 개죽음이 뻔한 상황이면 상부에 보고한 뒤 항복이 가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퇴와 항복을 금지한 유명한 사례로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명령 227호가 있지만, 실제 일선에서는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고 명령을 내린 스탈린조차도 다른 수단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실제로 전쟁 중기부터는 포로가 되었던 [[소련군]] 대부분이 원대복귀하며 유명무실해졌다. 반면 일본군은 이를 '''너무 철저하게 지켜서'''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쇼미더머니|많은 병력과 충분한 영토와 공업능력이 갖춰진 상황]]인지라 이런 병크를 저질러도 어느 정도는 용납이 되지만(물론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진 것 없고 영토가 작은 일본이 이런 짓을 따라한 것 자체가 에러다. 소련조차 [[베를린 전투]] 직전 시기가 되면 인원이 모자라 보통 1만명 이상의 병력인 [[사단(군사)|사단]]의 실제 병력이 [[연대(군대)|연대]]도 안되는 2천명 이하인 등 제대로 완편된 부대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세계에서 두번째로 [[기계화보병|차량화가 잘된 군대]]가 되어버렸다. 전후에 팔다리 하나쯤 없어도 여자 사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오죽 남자가 줄었으면 [[독일군]] 포로들을 소련 여성들이 덮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인구 많은 소련도 이럴진대 인구 얼마 되지도 않은 일본이 이런 짓을 따라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실상에 제일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프랑스군#s-4.6.4]]'''으로 볼 수는 있다. 이때의 프랑스군은 밝은 면도 있지만 또한 어두운 면으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후퇴를 하는건 물론이요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거나, 회의적인 발언을 해도, '''심지어는 항복을 해도''' 무조건 총살이었다. 이런 인명경시 탓에 연합군 사이에서 [[프래깅]]과 [[전쟁범죄]]가 많이 일어났고 심지어 적군 [[포로]]의 대우도 최악이었다. 사실 일본군도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체계와 더불어 이 당시의 프랑스군의 [[엘랑 비탈]]같은 정신주의와 [[청년학파]] 같은 군사교리들을 도입했다. 그런데 이 군국주의 체계를 제멋대로 이상하게 도입하는 바람에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역사에 길이 남은 내분]]'''이 탄생하게 된다. 원래 반자이 어택의 탄생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프로이센과 프랑스군의 나쁜점을 도입함으로써 [[일본군/문제점|이런]] [[반자이 어택|지경]]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나마 프랑스 육군은 이른바 "헌병 사냥"이라는 묘사가 나올 만큼 대규모 반란 사건을 겪은 뒤 페탱 장군 등 일부 지휘관들이 무분별한 총살 선고를 막는 등 처우를 개선했다. 다만 당시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대는 같은 인종인 동양인이 아니라 당시 동양인들 입장에서 보면 생소한 서양인이 였고 서양의 기술과 외형을 모방하려 했으나 서양의 사고관이나 정신은 이해하는 사람이 적은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당시 세계에 팽배한 제국주의로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에 준하는 노동과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으며 각지에 식민지가 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귀축영미|일반 신민들은 그들에게 잡히면 평생 노예로 가축처럼 부려지며 패배할 경우 본국의 여자들 역시 그들의 성노리개로 더욱 심한 고초를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상황]]또한 감안해야한다.물론 그런 본인들도 점령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약탈, 폭행, 강간, 학살등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결국 전쟁에서 졌고, 일찍이 항복하고 포로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일본이 이겼다면 그들의 죽음은 미화되어 영웅 대우를 받고있을 것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전투를 결사항전으로 승리한 기적같은 전투들 또한 세계사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가능할 것을 알고 전투에 임한 것이 잘못된 일인가? 모든 것은 결과에 따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일본의 포로대우가 처참한 수준이며 귀축영미 이미지를 만들어 항복을 막고, 정신력이 무기한계를 초월한다며 모자란 행동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전투에서 항복을 포기하고 결사항전을 택한 나라 또한 세계사에 흔한 일이다. 고로 이런 불가능한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 일본만의 고유 행동양식은 아니다. 특히 송나라의 경우는 더했는데 개개의 전투에서는 포로가 나왔지만 국가적으로는 항복 따위 없이 군주와 신하를 넘어 백성이 결사항전을 벌였으며, 마지막 전투의 패배가 전달되자 천자와 백성 수십만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근데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한건 쉴드쳐줄 일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