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조선인 (문단 편집) == [[8.15 광복|광복]] 그 후 == 조선인 일본병의 경우 육군 기준 94,978명이 징집되어 5,870명이 전사하고 89,108명이 귀환했다 (생존률 93.8%). 중국에 배치된 조선인 육군병은 15,941명 중 15,287명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어서, 사망률이 높았던 [[필리핀]] 전역에 배치된 육군병은 3,107명 중 951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생존률 30.6%). 뉴기니 등도 마찬가지였다 (2,877명 중 1,014명 귀환, 생존률 35.2%).[* [[http://www.kehs.or.kr/xe/?module=file&act=procFileDownload&file_srl=17054&sid=6af46ace84c2609cf551bed8f24858b1|일본군의 병력동원 규모와 추이]]][* 참고로 조선인 지원병들은 조선에 주둔한 조선군 소속 19, 20사단에 배치하는게 원칙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장이 넓어지며 정예 상비사단이었던 저 사단들을 필리핀이나 뉴기니 쪽으로 파병하면서 저렇게 된 것이다.] 해방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 조선인들은 1948년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장교나 하사관 출신 등 일부는 일본군 시절 경력을 살려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투신하거나 [[경찰공무원|경찰]]에 지원하게 된다. 학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은 학업을 마치고 관료나 정계에 진출해 대한민국 사회의 곳곳에 포진했으나 가난한 농어촌에서 태어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지원했던 [[조선지원병]] 출신들은 대다수가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한국의 시민이 되었다. [[관동군]]이나 [[조선군(일본제국)|조선군]]에 배치된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작전]]에 휘말리면서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된다. 당시 만주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부대가 껍데기만 남은 채 병력과 장비가 본토 방위를 위해 꾸준히 차출당하고, 그 공백은 재소집된 예비역 및 신규편성 부대 등으로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며, 조선군 역시 장기화되는 전쟁 속에서 정예 상비사단이었던 대다수의 전력이 [[뉴기니]], [[남양군도]] 방면으로 재배치되고 그 자리를 예비역이나 신규 편성 부대가 채워넣었기 때문에, 이들이 기습공격을 받고 와해되면서 하위 계급이 대부분이었던 조선인 징집병들은 대다수가 목숨을 부지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일본군의 일원으로 분류되어 '''[[굴라그]]'''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8년 수립된 북한정권이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들은 1949년을 기점으로 '''북한으로 송환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적 연립 정권으로 비교적 루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사상재교육 후 희망자에 한해서 남측으로 보내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정식 남북대화채널을 통해 인계하지 않고 각자가 [[38선]]을 '''알아서''' 넘어가도록 하는 바람에 남측을 선택한 대부분이 남파공작원이나 불법 월경자로 몰려 군 방첩부대에 붙잡혀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소련]]에 갔다왔다는''' 사실이 낙인으로 찍혀 [[반공]]을 국시로 하는 경직된 사회 속에서 [[연좌제]]에 걸리고 경찰과 [[안기부]]의 감시를 받는 등 [[6월 항쟁]] 직전까지 고초를 겪었다. [[광장(소설)|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일부는 소련에 남아 [[고려인]] 커뮤니티로 흡수되었다. [[일본령 동인도]]에 주둔중 종전을 맞은 일부 조선인들은 극소수가 신생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합류해 [[네덜란드 식민제국]]을 상대로 교전을 벌인다. [[전북]] [[완주군]] 출신 양칠성([[마인어]]명 코마루딘)이 그 예로,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을 앞두고 [[네덜란드]] 식민당국에 적발되어 처형당했다. 나머지 조선인들 역시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후에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현지에서 독립영웅으로 대우를 받았다. B, C급 전범으로 분류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내지로 송환’이 될 때 대만인과 함께 일본으로 인도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연합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인 전범은 형집행을 지속하도록 했지만, 조선인과 대만인은 [[대한민국|국적이 이미]] [[타이완|일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예외로 분류했다. 한국인 수용자들은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에 석방을 요구했지만, 우리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구금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기를 마쳐야 한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일본 [[후생성]]은 '''조선인은 [[8.15 광복|1945년 8월 15일 이후]]로는 외국인으로 분류된다'''는 논리로 일본군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들이 낸 피해보상 청구를 족족 기각하다가 1999년이 되어서야 보상을 시작했다.] 이들은 형기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석방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재일교포]] 사회에 합류했다. 광복을 맞은 지 5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에 돌아온 청년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또 다시 전쟁의 비극을 겪게 된다.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한국에 돌아온 일본군 소속 종군자는 [[남양군도]] [[펠렐리우 전투|펠렐리우 섬]]에 징용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미군에게 붙잡히면 잔혹하게 처형당한다는 말을 믿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정글속에 숨어 살다가 원주민에게 발견되어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80705.010080725480001|1955년 부산항을 통해 돌아온 조병기 씨]]이다. 그는 펠렐리우와 [[괌]], 일본을 거쳐 '''밀린 급여를 정산받고'''[* 이때는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대일청구권이 일괄 청산되기 전이었다.] 고향인 [[충북]] [[단양군]]으로 돌아갔으며, 재혼한 아내 및 아들, 형 내외등 가족과 상봉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경력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인 매장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었기에 대다수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함구했다. 그러다가 이들이 별세하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이나 [[만주국]] 훈장, 군복 등 과거 흔적이 나와 후손들을 멘붕에 빠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 주 소집연령이었던 [[1910년대]] 후반~[[1920년대]]생들이 이제는 별세를 앞둔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이들이 대부분 별세하는 [[2020년대]]를 전후로 실제 당사자로서의 증언과 기억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