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무기체계/원인 (문단 편집) == 시대에 뒤떨어진 군사 교리 == 우선 [[일본군]]의 군사교리 자체가 시대적으로 뒤떨어졌다. 외국의 경험을 이상한 결론으로 받아들이거나, 기존 교리를 발전, 향상시키지 않은 경우가 다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의 전차전 교리이다. 일본군의 전차는 1920 - 1930년대만 해도 중국대륙에서 [[전차]]도 [[대전차화기]]도 없는 [[국민혁명군]]이나 [[군벌]]들을 상대로 나름 활약하였다. 이 활약에 만족한 일본군은 전차는 소구경 대보병 화기를 탑재해서 보병지원용으로만 굴리면 된다는 수준에 머물렀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동 시기 다른 국가에도 이런 구식 사상에 찌든 군인이나 정치인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까지 일본은 제대로 된 전차전을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말이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이런 구시대적인 일본군은 결국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전차전을 교리로 한 소련군 전차부대에 대패하였다. 전투의 막바지에는 사단 규모 제대가 전멸하는 수준의 참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를 감추려고만 했을 뿐, 패전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전차전 교리의 수정, 신형 전차의 개발, 지휘 능력 향상을 위한 간부 교육, 군수 보급 체계의 개선 등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장교들은 한직으로 좌천돼 버렸다. '''소를 잃었다고 외양간을 스스로 헐어버린 것이다.''' 결국 일본군의 전차 운용 교리와 전차 수준은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1920, 1930년대 1차 세계대전의 수준에서 정체되고 만다. 게다가 시대의 변화를 알아채고 새로운 능력을 추가하기 위해 기술자가 노력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면, 기존에는 중시되었으나 해당 시점에서는 이미 쓸모가 없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의 성능이 안 나온다고 타박하여 결과적으로 물건을 더욱 개악하게 만드는 뻘짓도 자주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말아먹은 대표적인 사례가 [[A6M]], 즉 제로의 후계기가 될 예정으로 나온 [[A7M 렛푸]]. 실제로 미군은 1942년부터 고성능의 통신장비에 힘입은 [[타치 위브]]와 함께 붐앤줌이 새로운 전투 전술 교리로 채택되면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데, A7M 렛푸의 경우 개발 자체는 붐앤줌에 맞춰서 개발했으나, 해군이 선회전도 할 수 있게 익면하중을 낮추라고 개발진에게 강요한 게 렛푸의 속도 성능이 개판이 된 주 원인이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도 한몫을 거하게 했다. 일본 해군이 A7M 렛푸에서 위와 같은 삽질을 하는 동안 일본 육군은 이런 낡은 교리에서 비교적 빠르게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육군항공대가 1942년부터 운용한 [[Ki-44]]는 익면하중이 200kg/m²을 넘기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늦게 나온 Ki-61도 익면하중이 173.5 kg/m² 로 가벼운 기체는 아니다. 그리고 Ki-84의 익면하중도 171.47 kg/m² 으로 크게 차이가 없다. 뿐만 아니라 [[야기-우다 안테나]]와 관련된 전파탐신 문제에 관해서도 적에게 전파를 쏜다는 것은 자기 위치를 적에게 알리는 꼴이며 견시병으로 적을 감지하게 하면 된다는, [[봉화]]나 올리던 중세시대 시절의 논리를 들고 나와 전파탐신기의 채용조차 몇 년을 막았을 정도니.... 이로 인해 [[둘리틀 특공대]]의 보복을 겸해서 행해진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운명의 5분]],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VT신관]]을 채택한 미군의 함상 대공포의 화망 앞에 칠면조 사냥을 당하는 등의 끔찍한 부수적 피해의 결과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