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종교 (문단 편집) ==== 역사 ====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549년]] [[8월 15일]]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회]]가 기획한 일본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 이후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의 [[선교사]]들이 [[인도]]나 [[필리핀]] 등지에서 잇달아 입국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 [[수도회]]들은 각지에 수많은 성당, 수도원, 학교, 병원 등을 건설했고, 선교 65년 만인 1614년에는 성직자 150명, 신자 65만 명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화한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마저 기독교화해 최종적으로는 동북아 전체를 복음화하는 원대한 소망을 구상했을 정도였고[* [[역사스페셜]] 100화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 당했나?>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인인 권 빈센치오가 [[예수회]]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으나 조선에 파견되기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박해에 휘말려 [[순교]]했다.], 선교사들에게는 일본 선교의 성공이 더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호기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선교사#s-5|이 문단]]을 참고해보자. 아무튼 일본 기독교(특히 가톨릭) 전래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 것([age(1549-08-15)]년) 때문인지 [[교황청]]에서는 일본을 전교 지역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가톨릭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관할이 아닌 주교성 관할이다. 그러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금교령(禁敎令)을 기점으로 활기를 띄던 일본 가톨릭 교회를 철두철미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불교로 개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가톨릭 신자(키리시탄)들은 [[카쿠레키리시탄]]이 되어 숨어서 몰래 신앙을 유지했다. 막부는 데라우케(寺請)[* 주민들이 거주지에서 가까운 절에 불자로 등록하도록 하고, 절에서 그 주민을 단카로 지정해서 키리시탄이 아님을 보증하도록 규정한 제도. ] 및 단가(檀家)[* 데라우케에 따라 일정한 [[절(불교)|절]]에 속하여 시주를 하며 절의 재정을 돕는 집, 또는 그러한 사람.] 제도를 실시해서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불자로 등록하게 했고, 사찰에 주민등록증 개념과 비슷한 불자 증명서인 종문개장을 발급할 권한을 부여했으며[* 당연히 카쿠레키리시탄이라도 경조사를 절에서 해결해야 했다.], [[후미에]]로 숨은 키리시탄들을 잡아내 배교시키려 하며 선교사의 입국을 철저히 막았다.[* 막말까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은 서양 국가인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당시 앞장 서서 [[성상파괴운동]]을 주도했고, 가톨릭 국가 [[스페인]]과 치열한 독립전쟁으로 반 가톨릭 정서가 심했다. 또한 일본과 무역 활동시 크게 종교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한 번 꺾인 선교열은 도쿠가와 막부말인 1846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일본 선교 계획을 재수립하기까지 259년 동안 일본 가톨릭교회를 침묵 속에 놓아두었다.[* [[이탈리아인]] 선교사인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1668~1714)가 밀입국한 일이 있었지만, [[카쿠레키리시탄]]과 접촉하지 못한 채 막부에 투옥되어 옥사했고 쇄국정책 탓에 다른 선교사들이 올 수도 없었다.] 결국 3세기 가까운 박해[* 억압받은 기간으로만 치면 조선의 2~3배에 육박한다.]는 일본 가톨릭교회의 폭발적인 증가력과 동아시아 선교의 교두보라는 2가지 역할을 빼앗았다. 그 결과 선교 4세기 동안의 교세 증가율은 선교 활동 초기에 비해서조차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교육·의료·사회 복지를 축으로 하는 일본 가톨릭교회의 사목적 노력에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0년대에도 여전해서 가톨릭 인구는 95만명 정도라고 한다.[* [[지바시]]의 인구(2015년 기준)와 비슷하다.] 개신교의 경우 [[매튜 페리(군인)|매슈 페리]]의 [[흑선내항]]을 기점으로 일본이 개항되자 다른 개신 종파들도 일본에 유입되었다. [[개신교]]는 [[1859년]]에 [[미국]]에서 [[성공회]] 선교사 존 리긴스(John Liggins)와 채닝 윌리엄스(Channing Williams)가 일본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한다. [[한국 개신교]]가 그랬듯, 일본 개신교 선교사들도 직접적인 선교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의료기관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2010년대에 개신교는 약 43만명쯤 된다.[* [[도쿄도]] [[신주쿠구]], 또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시]] 인구의 1.3배 가량이며 도쿄도의 [[시나가와구]]인구보다 약간 많다.] [[정교회]]는 [[1861년]]에 [[러시아 정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이반 카삿킨]](Иван Касаткин)[* 이후 사도 대등자 성 니콜라이(亜使徒聖ニコライ)로 시성됨.]이 일본에 입국하면서 전래되었다. 1912년, 니콜라이 주교의 안식 당시 약 3만여명의 신자가 소속되어 가톨릭에 버금가는 규모로 급속히 성장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로부터의 지원이 축소되고, 소비에트와의 협력을 견제한 일본 군부의 탄압으로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Сергий Тихомиров)가 체포되는 등 외압으로 인해 교세가 축소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패전 후 개신교나 가톨릭이 어느 정도 교세를 확대해가던 시기에 [[GHQ]]의 명령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미국대교구 관리하에 놓이는 일이 생겼고, 이로 인해 교단이 미국파와 러시아파로 분열되는 등 교세를 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2014년 기준으로 신자 수는 약 1만명이며, 일본 전역에 60여 개의 성당 및 공소가 있다.[* 하코다테의 부활성당, 도쿄의 부활대성당(니콜라이당) 등이 유명하다.] [[수도원]]은 2018년 말 경에 [[시즈오카현]] 아지로(網代)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2019년 7월 폐쇄된 상황이다. 한편 일본 정교회 소속이 아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직할 성당이 2곳과 루마니아 정교회 소속 성당이 도쿄도내에,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의 수도원 1곳이 치바현에 소재한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소속의 선교회도 활동 중이다. 비칼케돈파 교회인 [[콥트 정교회]]의 경우, 에티오피아, 이집트 출신 거주민들의 요청으로 2004년에 처음 일본에 들어와 이집트인 사제가 사목활동을 이어왔다. 2016년 7월 18일 교토부 기즈가와 시에 일본 내 최초의 성당인 시드니 교구 소속 성모 마리아-성 마르코 콥트 정교회 성당이 세워졌으며, 2017년 현재, 전국적으로 일본인 신자를 포함한 80-100명의 신자가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에도 막부보다 상대적으로 덜했을 뿐,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서구 열강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873년]]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었지만, [[신사참배]]는 종교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그 자유의 수준에는 제한이 컸다. 종교적 신념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당하는 사례는 당대 식민지배를 당하던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많았다. 또한 1939년의 종교단체법으로 외국인이 교단의 대표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면서, 외국인 성직자가 대표자인 교단,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의 주교들이 강제로 은퇴, 체포당하는 등 전시체제 하에서는 기독교 탄압도 재개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약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관과 기독교의 종교관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가톨릭교회에서는 16세기 당시 원활했던 교세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과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150년 일본 선교가 진행되어 오면서 일본의 문화와 교육, 의료, 도덕 윤리에 대해 기독교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으나, [[샤머니즘]]과 조상숭배 등에 대해서는 대결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기에 바꿀 수는 없다. 개신교인들이 [[제사]] 같은 행위를 하지 않는 이유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소설)|침묵]]>에 등장하는 선교사 페레이라 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 민족은 인간과 아주 동떨어진 신을 생각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오. 이 민족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도 갖고 있지 않소. (중략) 이 민족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장시킨 어떤 것을 신이라 부르오.[* [[신토]]의 '현인신' 개념을 지칭하는 듯 하다.]" 결국 일본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다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에서는 유일신 기독교 교세 확장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사도 토마스]] 이래로 수많은 선교사들이 공을 들이고 있음에도 [[인도]]의 기독교 신자 비율은 미미한데, 실컷 선교해 놓으니 그냥 [[힌두교]]식으로 자기가 믿는 여러 신들 중 하나로 편입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