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송) (문단 편집) === 가족 관계와 후사 문제 === ||[[파일:자성광헌황후 조씨.jpg]]|| ||'''인종(오른쪽)과 자성광헌황후 조씨'''|| 인종의 첫번째 황후는 [[폐후 곽씨]](廢后 郭氏)였다. 하지만 투기가 심하고 인종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고 상처를 내었다는 이유로 1033년 폐후된 뒤[* 인종은 곽황후를 폐할 때 자신이 총애한 장귀비(당시 장미인)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이때 장귀비의 황후 책봉을 찬성한 여이간과 책봉을 반대한 범중엄, 구양수, 한기 등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 당시 범중엄 등 반대파들은 “국모이신 황후마마를 경솔하게 폐립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대의명분을 내세워 여이간을 비난했다.] 정비(淨妃)로 강등되었다가 1035년에 병으로 죽었다. 인종은 곽씨를 그리워하여 황후로 다시 추존하였으나 시호나 종묘 배향은 없었다. 곽씨를 황후에서 폐위시킨 뒤, 1034년에 18살이었던 개국 공신 조빈의 손녀를 황후로 세웠는데 그녀가 두번째 황후이자 계후인 [[자성광헌황후]] 조씨(慈聖光献皇后 曹氏)였다. 자성광헌황후 조씨는 개국 공신의 손녀인데다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고 소박한데다 침착했다고 <송사>에서는 전해지는데, 그녀는 후계자 선정문제를 놓고 남편 인종과 대립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양자인 영종과도 국정 주도권과 친부의 봉직 제수 문제 등으로 영종이 병석에 눕기 전까지 대립했다고 한다. ~~물론 자성광헌황후 조씨에게 다소 무례해보이는 태도를 취하다가 필요한 순간부터 갑자기 문안인사를 고의로 드리고 모후의 건강을 기원한다면서 술을 취하도록 먹여서 사인을 받아낸 영종 잘못이 크지만...~~ 아울러 황후 조씨는 궁 안에서 변고가 났을 때, 잠시 혼란에 빠져 불안해하던 남편 인종에게 서둘러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을 움직이도록 하고 침착하게 대응케 했던 일화도 있다. 인종은 그 외에도 16명의 후궁을 뒀는데[* 사후 추존된 온성황후 장씨를 제외하면 15명이다.] 이중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 귀비는 그녀 사후 인종에 의해 추존되어 온성황후 장씨(溫成皇后 張氏)가 되었다. 그는 총 3남 13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사후 추존된 온성황후 장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셋[* 동국 공주, 진국 공주, 당국 공주]을 제외하고는 정실부인들[* 추존된 온성황후 포함]과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고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들도 모두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따라서 인종은 대를 이을 양자로 [[태종(송)|송태종]]의 4남 상공정왕 [[조원분]](趙元份)의 손자이며 사촌 동생 복안의왕 [[조윤양]]의 13번째 아들인 조종실[* 즉, 송 인종에게는 5촌 조카.]을 일찍이 궁으로 데리고 가서 길렀다. 양자인 조종실[* 뒤에 휘를 서(曙)로 바꿨다. 참고로 조서의 아내 고씨의 이모가 인종의 계후인 자성광헌황후 조씨이다.]은 궁에서 성장하다가 인종이 아들을 얻자 다시 사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1043년 인종의 친아들이 요절한 이후에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았고 사저에서 살다가 뒤를 이어 영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인종은 1063년에 병사했으며, 영소릉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