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송) (문단 편집) === [[범중엄]]의 개혁과 좌절 === 인종 경력(庆历)3년(1043) 무렵부터 송나라 서쪽 국경은 점차 안정되어갔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 내부는 요나라, 서하와의 계속되는 전쟁과 세폐 문제, 조정 내 부정부패와 관료들의 봉급 문제[*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관료의 숫자가 증가했지만 정작 재정이 감당해내지 못했다.] 등으로 국고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종은 [[범중엄]]을 급히 개봉으로 불러 그를 부밀부사로, 소위 ‘4간’이라고 불리는 4명의 간관([[채양(북송)|채양]], [[구양수]], 왕소, 김정)을 새로 임명했다. 이들 4간은 8월 범중엄을 재상으로 추천했고 인종은 부재상 왕거정을 파면한 뒤 범중엄을 참지정사로 삼고 부필, 범중엄과 수차례에 걸쳐 치국방략을 논의했다. 이 당시 범중엄은 인종에게 송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사회 문제들을 한번에 해결하고 고치는 건 힘들며 개혁도 실패할 확률이 높음을 말하면서 개혁추진도 신중하고 천천히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종은 범중엄이 이렇게 말했음에도 사회문제들을 한번에 해결하겠다며 자신이 직접 자리까지 만들면서 범중엄을 재촉했다. 따라서 범중엄은 조정에 다시 들어오면서 「답수조조진10사(答手詔條陳十事)」를 적어 인종에게 올렸다. 이후 이 내용이 받아들여지면서 소위 ‘경력신정’이라고 불리는 개혁이 시행됐다. 당시 범중엄이 인종에게 건의해 반포된 내용들에는 조정 내 쇄신안과 함께 「답수조조진10사」에서 언급된 과거제의 엄격한 시행, 승진제도의 엄격한 시행, 지방에 파견하는 장관들을 잘 선발해야 함[* 당시 지방에 파견된 장관들의 부정부패와 백성에 대한 갈취가 심각했다.], 농사와 잠업 중시, 백성들의 부역을 줄일 것, 군을 정비하고 장비 관리에 힘쓸 것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런 조치가 발표된 이후, 범중엄은 다시 한번 인종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은밀히 개봉 외성을 수리할 것과 비밀리에 적을 토벌할 계책 등이 7가지가 추가로 포함됐고, 재상권 확대, 황제의 은혜 조치를 엄중하게 하는 등의 조치도 건의됐다. 범중엄의 건의 아래 경력신정이 추진됐지만, 범중엄이 예상한대로 신정 초기부터 황실, 외척, 권신 등이 개혁에 반발하며 그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특히 반대파 대신들은 매일같이 인종을 찾아가 “범중엄이 일부와 결탁해 직권을 남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고 참소했고, 조정 내에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물론 인종은 반대파 대신들을 강하게 질책하며 범중엄을 감싸주었다. 하지만 반대파 대신들이 틈만나면 범중엄을 탄핵하려고 한터라 범중엄도 자신이 더 이상 도성 안에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인종에게 변경의 일이 생겼기에 서부 변경을 수비하러 가겠다고 자청하기에 이른다. 범중엄이 스스로 변경 수비를 자처하자, 인종은 만류했으나 자신도 계속해서 신정을 반대하던 이들에게 시달리던 터라 결국 1045년 정월 범중엄을 즉시 변경으로 내보냈다.[* 이후 범중엄은 서부 변경 업무를 맡으면서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고 서하가 함부로 송나라 국경을 공격하지 못하게끔 했다.] 이처럼 범중엄 주도로 진행된 개혁은 1여년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범중엄 주도로 진행된 짦았던 신정 기간 동안 한때나마 관료기구도 재정비되면서 가문에 의지해 관직에 진출하던 풍속이 엄격히 제한되고, 경력만으로 승진하던 관례를 대신해 한 개인의 품성과 업적 등을 승진에 반영하는 조치들이 이뤄졌다. 또 이전과 다르게 과거시험도 실용적 답안들이 늘었고, 그 결과 학교가 증가하고 새로운 학풍도 싹트게 된 긍정적인 측면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