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송) (문단 편집) === 서하와의 전쟁 === 1038년 [[서하]]가 섬서성을 침공하면서 서하와 대립 구도에 놓였는데, 이에 [[범중엄]]을 기용하여 군사 제도를 개혁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나름대로 전력 강화를 꾀하였다. 이후 승상으로 기용된 범중엄은 관리 제도를 개편하고, 혹시 모를 서하와 요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무력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하는 1041년 다시 한번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초전에 송군이 [[개발살]] 나버려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무너질듯 말듯 버텨낸 덕분에 전쟁은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송이 [[요나라]]와 강화 조약을 맺으면서 군사력 일부를 서하 방면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고, 서하 역시 계속된 전쟁에 지쳐버린 상황이라 결국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서하가 먼저 강화를 신청하였다. 송 역시 전쟁이 길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만약 [[양면전쟁|요가 서하와 동맹을 맺고 공동 전선을 형성]]하면 매우 곤란해질 수 있었기에 즉시 강화 교섭에 착수하였다.[* 여담으로 서하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으로 [[적청]]이라는 인물이 유명하다. 송나라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한 명으로 당대에 무곡성(武曲星)의 화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활약을 펼쳐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런 만큼 시기와 모략도 잇달아 결국 파직되고 만다. 많은 민간 설화를 남긴 무인으로 중국에서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무인 중 한 사람이다.] 그 결과 1044년 서하는 송의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에 봉해졌으며, 매년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씩 '''송이 서하에게 공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송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정한 정책. 어떻게 보면 후대의 [[명나라|명]], [[청나라|청]]이 조공국에게 더 많은 이익을 안겨주었던 사건의 시초(?)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