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묘청의 난]](1135년 ~ 1136년) === 인종은 자신을 문벌귀족으로부터 지지해줄 외척 인주 이씨들이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게 되자 새로운 친위 세력 육성을 시도했다. 바로 그들이 서경파였는데 선왕 숙종, 예종이 [[장락궁]] 행차, [[용덕궁|궁궐]] 건설,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 정벌]] 등을 통해 세력기반을 다져 놓았고 대부분 문벌귀족이 개경 출신이라 서경엔 힘이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자겸 축출 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인종은 정지상, 백수한 등에게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서경 출신인 승려에게도 힘을 실었는데 그가 바로 [[풍수지리]]와 도참을 연구하던 [[묘청]]이다. 딱 여기까지면 꽤 괜찮았을 것이다. 정지상과 김부식은 각자 서경 대 개경, 문장 대 문장으로 끊임없이 대결해온 희대의 라이벌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서경은 [[장락궁]]을 중심으로 [[용덕궁]], [[대화궁]], [[구제궁]] 등 이름 있는 궁궐이 조성돼 서경 분사 조정과 개경 중앙 조정의 힘도 서로 견제해야 하는 통에 바빠졌다. 게다가 [[윤언이]](서경파가 제안한 '칭제건원'을 지지)같은 전형적인 개경 문벌귀족도 대금 사대 문제로 서경파를 은근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정계가 복잡해졌다. 인종은 뒤에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며 조금씩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문제는 이 대립이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묘청이 특히나 계속 선을 넘는 행동을 범했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시발점은 서경 천도 논의 때문이었다. 여진족 즉 금나라에 대한 사대는 고려에게 큰 수치였다. 《고려사》 <인종 세가> 재위 9년([[1131년]]) 9월 정유일 기록엔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되어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1,000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 라고 떠들고 다녀서 금 조정이 이를 알게 되면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간쟁했다. 하지만 인종은 결국 그를 임명했다. 묘청은 이 상황을 이용해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를 포함한 천하 36개국이 고려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한껏 떠들었다. 물론 이는 당연히 말이 안된다. 수도 하나 옮긴다고 주변국이 복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당시 동북아시아를 다스리던 이들은 금희종, 송고종, 서하숭종, 리신종, 요덕종, 스토쿠 덴노(실질적으로는 조우고인 도바 상황)등으로 요덕종과 숭종을 제외하면 평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만만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이 나라들은 일본만 빼면 그런대로 잘나가고 있었기 때문. 묘청은 [[서경(고려)|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온갖 술수로 인종을 현혹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예를 들면 [[대동강]] 물에 기름진 [[떡]]을 넣어서 강이 오색 영롱하게 빛나 보이게 했다는 둥, 서경의 궁궐로 들어가니까 노랫 소리가 들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서경 천도 논란으로 인해 조정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지만 개경파의 거두였던 [[김부식]]의 거센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게다가 [[대화궁|평양에 지은 궁궐]]에서 연이은 불길한 징조가 묘청의 입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비단 대화궁만이 아니라서 중흥사라는 절에서는 화재가 나고 인종이 행차하던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가 내리며 길 잃고 늪에 빠지고 진눈깨비까지 내리는 등 묘청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악재가 일어났고 이는 정적들에게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인종 역시 조금씩 막나가던 묘청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급기야 자신의 입지에 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묘청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묘청과 그 세력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짓고 서경 이북 지역을 장악해 나갔으나 총사령관 김부식의 재빠른 조처로 곧 서경에 고립되었고, 김부식의 조이기 전략 중 내분으로 묘청은 부장 [[조광#s-3]]에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서경의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서경 사람들이 다시 저항을 하게 되었고, 완전히 이를 진압하는 데는 1년이라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신채호]] 선생을 필두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남용하다 보니 묘청의 과격한 행동을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유학자들의 왜곡된 기록이라고 보는 시각도 간혹 있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묘지명에도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왜곡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편이다. 또한 서경 천도 문제는 인종이 사실상 일부러 키운 것이나 다름없어 소위 '''묘청의 난'''이라 불린 사건은 묘청이나 정지상 등의 서경파가 주도했다기보다는 '''왕이 자초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자세하게 표현하면 제 때에 멈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묘청의 난으로 인해 꽤 큰 타격을 입은 인종은 결국 스스로를 탓하는 조서를 써 [[중서문하성]] 및 기타 정부기관에 선포하였다. [[이자겸의 난]] 때는 자책하는 조서를 쓰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서경의 난이 매우 큰 충격이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관련하여 《[[동문선]]》 제23권에 <인왕죄기교서>(仁王罪己敎書)가 남아 있다. 특이한 건 내용에선 '죄기[[조서]]'라고 칭했는데 분류는 '교서'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