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반정 (문단 편집) == 반정의 결과 == [include(틀:조선 정사공신(인조))] 반정이 성공한 직후, [[류몽인|유몽인]]의 역모 사건, [[이괄의 난]], 박홍구의 역모 사건을 거치면서 북인들 중에서 광해군 시절에 권력 실세였거나 측근 세력들을 모두 역적 취급해, 북인 세력의 권력 실세와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을 일가친척까지 씨를 말리고 완전히 궤멸되었다. 한편 인조반정이 성공한 직후부터 즉시 북인 제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정인홍[* 당시 80 넘은 나이였는데, 그 나이로 처형까지 당한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사사로 끝난다.]과 이이첨을 비롯한 폐모론에 적극적이었던 대북의 핵심 요인 대부분이 사형을 당했고, 200여 명에 달하는 그 추종자도 유배에 처해졌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당시에는 북인 내에도 이이첨처럼 강경한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온건한 이들(소북파)도 다수 있었다. 소북 출신이었지만 유희분과 유희발의 경우에는 [[능창대군|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형 능양군이 가산을 털어 유희분에게 뇌물로 바치면서 동생을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유희분은 돈만 받아먹고는 들은체 만체 했다. 결국 능창군은 역모죄로 사사당한 것을 빌미로 유희분과 유희발을 처형시켰다. 이후에 유몽인의 역모 사건, 이괄의 난, 박홍구의 역모 사건을 거치면서 광해군 시절에 폐모론에 대해 온건 세력이며 북인 내에 권력 실세였던 [[유몽인]], [[기자헌]], [[박홍구]]가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북인의 세력들 중에서 광해군 시절, 북인 내의 실력자와 측근 세력들은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박승종은 지방으로 도망쳐 반격을 꾀했으나 한성이 이미 장악된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자결했다. 박승종도 역시, 이전부터 인조와 악연이 있었으니 대북 이이첨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인조의 아우 능창군이 얽힌 신경희의 옥사를 부풀렸던 추관이 바로 박승종이다. 최고 원인제공자인 왕은 죽일 수 없고 그 다음이 박승종이었고 인조는 반정공신들 의사가 어떻든 동생의 원수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나마 박승종은 저항을 멈추고 자결한 덕분에 둘째 아들과 형제들의 목숨은 보전할수 있었다. 그리고 당색이 강하지 않은 소북과 중북의 실무관료들, 김신국, 윤휘, 이경전, 정온, 남이공 등은 김류 줄타고 살아남아 주요 관직을 전전했다. 한편 왕의 부인 [[문성군부인|중전 류씨]]와 세자 부부 등 가족들 또한 폐서인되어 유배에 처해졌으며 [[강화도|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유 없이 죽여버린 건 아니고, 폐세자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가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폐세자 내외는 이로 인해 자결하였으며, 폐비도 화병으로 죽게 된다. 삼촌을 죽이면 폐모살제라는 명분이 흐려지기에 왕은 음식과 의복을 보태주고 광해군이 보고 싶어한 궁녀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신경을 써 주었고, 광해군은 환갑 넘게 천수를 누렸다. 반정의 주역인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아들이다. 공교롭게도 또다른 주모자인 [[김류]]는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의 부장이었던 김여물의 아들. 구굉과 함께 가장 먼저 반정을 준비한 인조의 최측근들로 반정 이후에도 중용받았다.]을 위시로 한 사대장과 최명길, 장유, 심기원, [[이시백]], 이시방,[* 이 두 사람은 이귀의 아들들로 현종 때까지 살아 대동법 관철 등에 기여했다. 또한 최명길~김자점은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친구 관계다. 그 스승은 [[이항복]].] 김자점 등 33명은 정사공신으로 신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고 마침내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반정을 방조했던 남인들도 남인 원로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2등 공신에 봉해진 이괄은 자신이 1등 공신이 아니라는데 불만을 품고, 핵심 공신 김류와 척을 지며 처신을 엉망으로 하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반정 직후 앞뒤 사정을 모르는 명나라는 이를 그닥 환영하지 않았다. 왕이 뭘 잘못했기에 폐위됐냐는 비난과 [[왜군]]을 끌어들여 왕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고. 나중에 [[모문룡]]의 추천으로 22개월만에 [[명나라]]의 승인을 얻었고, 때문에 이후 모문룡이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에 눌러앉아 벌이는 행패를 제어하기 힘들어 고생했다. [[청나라]]의 침공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가도의 모문룡이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에게 더 호의적이어서 조정에서 모문룡을 설득하는 데 비상이 걸렸던 적도 있다. 정충신이 이괄이 가도와 손을 잡으면 필승이라고 추정했을 정도였다. 광해군 재위기간 내내 이어진 거대한 궁궐 공사는 중단되고, 세금이 덜어지면서 민생은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영정법]], [[대동법]], [[호패법]] 등 각종 제도개혁은 광해군 때에 토목공사와 수탈로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많은 시행착오와 지난한 실무 인재 육성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흥망은 다양했다. 다소 과격한 성품이었던 이귀는 이후 10년 동안 왕의 총애를 못 입다가, 그나마 막판에 왕의 친부 [[정원군|정원대원군]]의 추숭(원종)[* 인조는 선조와 소성대비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지만 왕이 자신은 정원군의 아들로서 즉위한 것으로 하기 위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까지 올렸다. [[대원군]]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친부에게 올리던 것이니 상관없지만, 묘호는 왕이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앞서 이야기한대로 정원군은 왕이 될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조도 자신의 부친인 [[덕흥대원군|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숭한 것에서 그쳤다. 이는 유학적으로 봤을 때에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기에 대다수의 관료들이 반대하였는데, 왕은 이를 밀어붙였고, 결국 통과시켰다. 본인은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소현세자]]가 급사하고, 차자인 [[효종(조선)|효종]]이 뒤를 잇게 되면서 발생하는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유학, 특히 [[성리학]]은 눈으로 보이는 '''예(禮)'''를 바로 세우는데에 아주 민감한데, 모범이 되어야할 왕실이 몇번이나 이를 어겼다. 여기에 조선 예학의 중심을 자처하던 [[송시열]]의 존재는 상황을 헬게이트로 가게 만들 요소였다.\]]에 찬성해 신임을 얻었지만 그 1년 뒤 사망하고[* 그래도 이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의 아들 이시백, 이시방은 왕의 총애를 꽤 받아서, 왕이 죽으며 효종에게 김자점과 더불어 잘 예우하라는 분부를 내린 게 이시백이었다. 효종 때도 꽤 나아가기도 했고 명문가가 되기도 했다. 특히 이시백의 경우 왕이 죽으면서 효종에게 잘 예우하라는 두 사람중 하나이기도 했다.(다른 하나는 김자점, 하지만 김자점은 [[역모|자폭을 터뜨려]] 거열형을 당했다.)] 김류는 처음엔 이귀와 대비되어 일찍이 정승에도 올랐지만[* 이귀는 한평생 앉아보지 못했다.] 추숭과 [[민회빈 강씨]] [[사약|사사]]에 반대해 왕의 노여움을 샀고 [[김경징|아들]]의 사형을 청하는 신하들의 행보에까지 합류해야 했다.[* 호란 당시 김경징은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강도검찰사가 되었고, 동시에 왕족 일가를 지키는 임무까지 함께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왕실 인사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죄목으로(원손은 강빈이 내관들에게 맡겨 배에 태워 [[충청도]]로 도피시켰지만 나머지는 전부 사로잡혔다.) 처형되었다.] 김자점은 군사 부분에 밝은 신무관료로서 [[어영청]]을 정비해 중앙군 강화에 공을 세웠지만 인조 말년에 봉림대군([[효종(조선)|효종]])이 세자가 되는 것과 [[강빈]] 사사에 찬성해 권세를 누리다 효종 때 산당에 의해 힘을 잃고 결국 '김자점의 옥사'로 인해 아들들과 함께 역률이 적용되어 [[거열형]]을 받는다. 심기원은 인조 때 왕이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잘못 돌아간다며 세자를 옹립하려다가 포기하고 [[회은군]]을 세우려다가 걸려서 복주된다. [[최명길(조선)|최명길]] 또한 두번의 호란으로 척화파에게 공격받고 횡의 문제로 인해 한동안 청의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사안을 해결해 귀국한 뒤에는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고 봉림대군으로 후사를 바꾸는 조치로 인해 마음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구굉, 구인후, 이서, 신경진은 무신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권세가 덜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반정 이후 서인계 무장은 훗날 5군영이 되는 군벌을 조직해 실권을 행사했다. 구굉과 구인후는 능성 구씨, 신경진은 평산 신씨로 원래 조선 최고의 명문 무가 출신이었고[* [[이순신]]을 배출한 덕수 이씨도 조선 후기 3대 무가로 꼽는 사람이 있으나, 덕수 이씨가 무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이순신 이후의 일이라 다른 두 가문에 비해 역사가 훨씬 짧았고, 영조 이후에 빛을 보기 시작해 고종대 무과급제자를 대거 배출했다.] 왕의 인척이기도 했다.[* [[인헌왕후]]로 추존된 왕의 어머니가 [[능성 구씨]]라 구굉이 왕의 외삼촌, 구인후가 인조의 외사촌이자 구굉의 조카이다. 왕의 외할머니 평산부부인 신씨가 신립의 여동생이며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이니 왕에겐 외당숙이 된다. 아들들을 당대 명문 무가와 짝지은 것은 어머니 [[인빈 김씨]]의 수완으로 김씨는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신성군]]이 사망해 가망이 없어지자 다시 세자에게 조카딸을 시집보내고 정치적으로 세자를 지원하는데 힘 쓰는 정치력을 발휘했었다.] 구굉은 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판의금부사, 오위도총관, 병조판서, 훈련대장, 총융대장 등을 역임했다. 스스로 왕 앞에서 일국의 병권이 모두 자신에게 모였다고 말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다. 구인후는 구굉 생전에는 반정 현장에 있던 구굉만 못했지만 심기원의 옥사 이후로 능천부원군, 좌의정까지 오른다. 시호는 충무공. 능성 구씨 일가의 군부 장악력은 [[정조(조선)|정조]] 대 구선복이 몰락하고 장용영을 신설할때까지 지속되었다. 신경진은 훈련대장과 각 판서에 삼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효령대군]]의 후손 이서 역시 완풍군에 봉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