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민행동당 (문단 편집) === [[UMNO]]와의 [[갈등]] ===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시아 연방의 [[정당]]이 되었지만, [[말레이인]] 우선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UMNO]]와 [[화교]] 위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은 합방 직후부터 갈등을 벌였다.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시아인들의 말레이시아'(Malaysian Malaysia)를 주창했다. [[인종]]에 상관없이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모든 말레이시아인에게는 똑같은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말레이인들을 비롯한 UMNO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화교에 비해 경제력이나 학업 성취도 면에서 말레이계가 너무 뒤쳐져 있으니 이대로 똑같이 평등하다면 말레이인들은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밀어붙이려는 UMNO를 견제하기 위해 [[1964년]] 말레이시아 [[총선]]에 참여했다. 비록 2.0%의 득표율로 [[페낭]]에서 1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말레이시아 내에서는 꽤 많은 호응을 얻었고[* 말레이시아에서는 [[1964년]] 총선에서 경과 조치로 [[1963년]]에 연방 가입을 받았던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에 대해서는 총선을 치르지 않았고 대신에 총선 후 각 주에서 알아서 하원의원을 선출해 연방의회에 파견하도록 했다. 이 중 사라왁과 사바는 연방하원의원을 선출해 파견했으나 싱가포르의 경우 선출 이전에 쫓겨나서 하원의원이 선출되어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이는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지역정당으로 남길 원했던 UMNO에 엄청난 어그로를 끌었다. 싱가포르를 포함 말레이 반도 전역에서 말레이인과 화교의 갈등이 엄청났는데 싱가포르 가입 후 국내 화교가 더 많아지니 말레이인들의 불안감은 더해져갔고, 이는 여러 번의 소요 사태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싱가포르에 혼란을 부추겨 공산혁명을 시도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의 선동도 한몫했다. 결국 말레이시아는 [[국가]] 안정을 위해 싱가포르를 [[1965년]] 연방에서 축출했다.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 싱가포르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싱가포르의 축출 이후 말레이시아는 국내에서 인민행동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한다. 이에 싱가포르인이 아닌 인민행동당 당원들의 당적도 말소되었고, 이들은 말레이시아에서 [[민주행동당]]을 차렸다. 이 민주행동당은 인민행동당과는 반대로 초창기의 색채가 유지되어 우경화가 진행된 인민행동당과 다르게 중도좌파 정당으로 분류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