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민행동당 (문단 편집) === [[사회주의]] 갈등 === 인민행동당이 커지면서 현지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인민행동당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영향인지 당내에서도 이념 갈등이 심화된다. 그리고 이런 이념 갈등에 확실한 불을 붙인게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문제였다. 싱가포르는 당시 영국령 [[해협 식민지]]([[말레이 반도]] + 싱가포르 + 북보르네오)의 한 지역이었는데,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소왕국들에 대해서는 [[속국]]으로 부리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했고, 싱가포르는 중요 지역으로서 직할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영국령 해협 식민지 내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역이었으며, 특히 [[영국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해 [[중국계 싱가포르인|화교]]들을 싱가포르에 데려오면서 싱가포르는 해협 식민지의 다른 지역과 달리 [[말레이인]]보다 화교가 더 많았다. 애초에 1819년 스탬포드 래플스가 새 무역항 입지를 물색하다 싱가포르를 발견하였을 당시 인구수가 약 150명에 불과했을 만큼, 말레이인이 전통적으로 터를 잡아 살던 지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영국이 물러가고 [[해협]]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는 한 식민지로서 서로 교류가 많았지만 영국 식민지 시절 유입된 화교가 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바람에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화교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일단 말레이 반도는 [[1957년]]에 [[말라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달성했고 당시 싱가포르는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리콴유는 말레이 반도에 물자를 대주는 [[항구]] 및 [[무역]] 중개지로서 발전해온 싱가포르의 역사를 볼 때 말라야 연방에 가입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해 말라야 연방에 가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말라야 연방 가입에 반대했다. 당시 반공 성향이 강했던 말라야 연방의 여당 [[UMNO]]가 자신들을 탄압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사실 싱가포르 사회주의자들은 싱가포르의 말라야 연방 가입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말레이인 위주의 [[UMNO]]가 화교들 위주의 싱가포르를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1961년]]에 [[UMNO]]의 당수이자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말라야 연방의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와 함께 싱가포르의 연방 가입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는 UMNO가 화교만큼 싫어했던 인민행동당 내 [[좌파]]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었으며, 실제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싱가포르의 가입 계획에 충격을 받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리콴유를 비롯한 당내 반대파들을 이기지 못하고 당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인민행동당은 점차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반공]] 정당이 되어간다. 하여튼 그렇게 싱가포르는 [[1963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여 [[말레이시아]]의 한 [[주]]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