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루겅 (문단 편집) === 참혹한 최후 === ||[[파일:조리돌림은여경.jpg]]|| || 종전 후 체포되어 조리돌려지는 인루겅 ||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인루겅은 12월 5일, [[왕커민]], 왕읍당, 왕음태, [[치셰위안]] 등 260명의 화북 한간들과 함께 불시에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1946년 5월 26일, 인루겅은 왕음태 등 13명의 화북의 거물 한간들과 함께 난징으로 압송되었다. 체포된 후 인루겅은 <10년 회고록>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집필하였고 6월 27일, 재판을 받았는데 2천명의 방청객이 몰려왔다. 인루겅과 그의 변호인 장문백은 [[기동사변]]에 대해 [[쑹저위안]]의 양해를 구한 일이었으며 자신이 젊을 적에 혁명에 참여한 애국자였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과의 악연을 청산하려고 애썼다고 하는 등 열심히 혐의를 부인했다. 9월 28일의 2차 공판 이후 재판정은 그의 주장을 기각하고 그가 중일전쟁 이전에도 국체파괴, 국토폭동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기동사변]]의 주모자 노릇한 것에 대해서는 무기징역과 종신공권박탈을 선언했고 중일전쟁 이후의 일본 부역에 대해서는 적국통모, 본국반항죄로 사형, 종신공권박탈, 전재산 몰수를 선언했다. 인루겅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항소하여 1947년 7월 31일, 다시 법정에 섰는데 역시 사형이 확정되었다. [[https://www.weibo.com/ttarticle/p/show?id=2310474159815868906138|인루겅의 마지막 모습들을 확인하려면 이곳으로.]] ||[[파일:재판정은여경.jpg]]|| || 법정에 선 인루겅 || 인루겅은 체포에 항의하며 자신은 애국을 위해 일본에 협조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때 도쿄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렸는데 연합국은 [[하매 협정]] 체결 과정에 있어 인루겅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루겅을 도쿄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인루겅은 마지막으로 7통의 유서를 남긴 후 12월 1일, 난징 우화대의 형장으로 끌려갔다. 인루겅은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자신은 불교도이므로 앉은 채로 죽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큰 소리로 경문을 읽다가 총을 맞고 절명했다. ||[[파일:총살된은여경.jpg]]|| || 인루겅의 최후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