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루겅 (문단 편집) === [[국민정부]] 합류 === 1926년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자, 인루겅은 [[중국 국민당]]에 가입, [[국민혁명군]]의 난창 공략에 참가하였으며 국민혁명군 외교특파원에 임명되어 일본군과 협상했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외교부장 겸 상하이 시장 황푸의 비서가 되어 상하이시 정부에서 일본과의 협상을 맡았다. 1928년 [[제남 사건]]이 일어나자 5월에서 7월 사이, 황푸의 지시로 일본 측과의 교섭에 참여했다. 허나 일본의 포악한 태도에 실망한 국민정부가 외교부장을 지일파인 황푸에서 구미에 인맥이 많은 [[왕정팅]]으로 교체하면서 배제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인루겅은 상하이시 참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상하이 시장 [[우톄청]]의 대표로 일본 측의 시오자와 고이치 제독,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와 담판하였다. 1933년 [[열하사변]] 발생 이후 당고의 회담장에서도 참여하였다. 1933년 [[당고정전협정]]이 체결되자 베이핑 평정회의의 일원이 되어 당고정전협정 이후 뒷처리를 위한 선후회담에 여럿 참여했다. 일본은 일찍이 인루겅을 눈여겨보며 일부러 그를 크게 칭찬하며 그를 부추기곤 했다. 6월 29일, 국민정부는 협정에 따라 우학충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전구 접수 위원회를 수립하였는데 이에 따라 기동 지역은 22개현으로 나뉘어졌으며 10월 8일, 베이핑 평정회의의 결정에 따라 인루겅은 도상명과 함께 란유, 계밀 두 지역의 행정독찰전원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