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루겅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885년 절강성 온주부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부유하여 1902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어를 공부한 후 1905년 도쿄제국대학 산하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가고시마 7고교를 거쳐 젊은 나이에 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여자와 결혼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황싱]]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여 형 인루리(殷汝驪)와 함께 혁명활동에 참가하였으며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된 이후 국민당에 가입했다. 1913년 [[계축전쟁]]이 발생하자 다시 혁명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와세다대학]]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그의 누이가 일본군 헌병대 장교와 결혼하였는데 덕분에 인루겅은 일본군 군부와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 두루 인맥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인루겅은 매우 친일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 한동안 형 인루리와 함께 구사연구회의 발기인으로 참가, 역사를 연구했다. ||[[파일:젊은은여경.jpg]]|| || 젊은 시절의 인루겅 || 1916년 중국으로 돌아간 인루겅은 북양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다가 [[호법운동]]이 벌어지자 참가했다. 1920년 [[안직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21년 11월, 대창사창의 경영자 장요약과 함께 신농간식공사(新農墾植公司)를 설립하고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차관계약을 체결하는 등 사업을 하였다. 1925년 [[봉천군벌]]의 [[궈쑹링]]이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외치며 [[반봉사건]]을 일으키자 인루겅은 여기에 가담, 취임을 거부한 외교처장 왕정연을 대신하여 제세영과 함께 외교처장을 대리하여 일본 측에 자신들이 공산당과 [[펑위샹]]과 제휴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일본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나 관동군의 개입으로 궈쑹링이 체포되어 처형되자 인루겅은 일본 조계지로 도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