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익주 (문단 편집)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이후 === 촉한이 [[위(삼국시대)|위나라]]에게 망하고 곧 이어 [[서진#s-1]]이 들어선 265년, 북동부 '파' 지역에 양주(梁州), 271년 건녕 등 남부에 영주(寧州)를 신설했다(269년에는 무도·음평·농서 지역은 [[옹주]]에서 나눠 [[진주]](秦州)를 세웠다). 따라서 서진 19주 가운데 4주가 옛 촉의 땅이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때는 저족의 이민족 왕조 [[성한]]이 들어섰고 이후 남조의 [[동진]]이 점령했다가 화북정권인 서위(북주)가 빼앗아 이후로 [[수나라#s-4]]~[[당(통일왕조)|당나라]] 시절에 이른다. 당나라 시절엔 [[안사의 난]]으로 [[당현종]]이 청두로 피난했을 당시 반란진압기간 동안 장안에서 임시로 천도하기도 했다. 참고로 중국 역사상 현재의 운남성 일대에 해당되는 [[남중칠군]]까지 확실하게 통치권을 확보한건 [[한나라]] [[한무제]] 때부터이지만 독립적인 성격도 강했다. 실제로 [[당나라]] [[현종(당)|현종]] 천보 연간 [[남조(왕국)|남조]] 때 중국은 윈난성 전체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명나라 초기까지 운남성은 무려 630여년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립상태~준 독립상태를 유지했다. 후한 말기 이곳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225년 [[촉한]]의 [[제갈량]]에 의해 평정되면서 촉한의 통치에 들어온다. 일종의 준자치구가 됐다고 보면 될 듯. 안정적으로 이곳을 관리하던 촉한이 멸망하고 이곳은 촉한의 내항도독이었던 [[곽익]]이 계속 관리하다가 서진 시기인 271년에 익주에서 영주(寧州)로 나뉘었고 옛 촉한 남중 지역의 4군을 거느렸는데, 그 땅은 대략 현재의 윈난성 지역에 해당한다. 영주는 284년 폐지되었다가 302년에 다시 세워지는데 302년부터 306년까지 대대적인 반란이 있었으며 이때 칠군이 두절되어 위급한 상황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역병까지 돌아 남중은 십만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피폐해진다. 310년 왕손이라는 인물이 영주자사가 되지만 남중은 폐허가 되었으며 왕손은 폭정을 일삼았고 결국 333년 남중은 [[성한]] 정권에 넘어간다. 이후 성한이 347년 동진의 [[환온]]에게 멸망하면서 남중은 다시 동진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통치력이 유효하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