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익산시 (문단 편집) == [[익산시/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익산시/역사)] [include(틀:익산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백제]] 이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익산 지역의 중심은 [[미륵산]] 근처의 금마와 호남대로의 길목인 여산이었다. 전근대에는 산지가 용수, 땔감, 부식 등의 확보에 유리하였기에 평야 한가운데가 아니라 산과 평야가 만나는 곳에 도시가 발달하였다.[* 또한 고대 [[한반도]]의 농경지는 기본적으로 경사지였다. 농업 용수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 평지를 자유자재로 개간하여 농경을 하는 것은 최소한 고려 후기 이후에 정착되었다. 김제 평야, 나주 평야는 [[삼국시대]]에는 대부분 바다였었고, 이후에도 지금처럼 곡창지대가 아니라 미개간 습지로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다.] 더욱이 애당초 삼국시대에는 서해안의 대부분 평야 지대가 아직 바다였었다. 평지 위에 인위적으로 설계된 익산 시가지(이리)는 백제 시절의 시가지로 추정되는 곳과는 다른 위치에 조성되었고,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된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 등이 보존되었다. [[미륵사]] 등 백제의 대규모 유적지가 있음을 근거로, 백제 [[무왕(백제)|무왕]] 대에 이 곳으로 천도를 시도했다고 보는 추측이 있다. 왕궁리 유적 발굴이 진행되면서 '''백제의 제2수도였다고 추측했던 문헌사학계의 추정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대국가의 수도에 위치해야 하는 궁성(왕궁리유적), 종묘([[제석사지]]), 왕릉([[쌍릉|익산 쌍릉]]), 산성(오금산성, [[미륵산성]]) 등이 있음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수도 노릇을 하려면 왕궁에 물자를 조달하고 각종 관청의 행정기능과 근무인원의 거주지 역할을 수행하는 대규모 도시가 필요한데 그런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 그래서 정말 하나의 제대로 된 수도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이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는 익산 일대가 수도 사비성과는 별개로 조성된, 일종의 제2수도였으리라는 쪽으로 의견을 좁히는 중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근초고왕]] 시기에도 [[고구려]]의 반격에 대비해 위례성에서 지금의 경기도 광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적이 있는데, 신라와의 전쟁을 자주 벌였던 무왕인 만큼 비슷한 이유로 제2수도를 꾸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산 일대가 무왕이 유년기와 성장기를 보냈던 곳이란 사실이 한몫 하는 걸로 보인다. 당장 익산쌍릉이 무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렇다는 건 무왕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익산에서 국정을 보고 그곳에서 죽어 묻혔다는 뜻이 된다. 익산이 백제의 '별도(別都)'라는 얘기는 호사가들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하는 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