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희호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화고 이희호 1939.jpg|width=100%]]}}} || || {{{#ffc224 '''1939년 이화고 재학시절의 이희호(우측)'''}}} || 6남 2녀 중 [[장녀]]이자 넷째로 [[서울특별시|일제강점기 경성부]] 수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용기는 국내 '[[의사]] 면허 4호'로, [[연세대학교/학부/의과대학|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전라북도]] [[남원시]] 도립병원장,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도립병원장을 지내는 등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이순이는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실한 [[감리교]] 신자였기에[* 참고로, 잘 안 알려졌지만, 아버지도 개신교였다.], 그 영향에 따라 [[모태신앙]]을 갖게 된다. "여자도 공부 많이해야 한다"는 모친의 뜻에 따라, [[서산초등학교|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1936년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의 전신) 입학하였다. 보통 학교 재학 당시 [[반장(학교)|반장]]을 하는 등, 솔선수범의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18살 때 모친이 사망하여,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어떤 것이 여성인 나를 위한 길인지 생각한 뒤에,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 3가지가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첫 번째는 '결혼하지 말자', 2번째는 '건강하자', 3번째는 '공부를 많이 하자'였다고 한다.[* 이희호 자서전 <동행>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42년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이때 잠시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한다. 1946년 9월, 이번엔 [[서울대학교/학부/사범대학|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시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2학년 때 전공을 옮겨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에는 그 당시 많은 청년들이 그랬듯이 광복군출신 [[이범석(1900)|이범석]]이 창단했던 [[조선민족청년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으로는 정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축인데 1943년도에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가 5,504명, 그중에 여학생은 고작 1,255명이었다. 1944년도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거주하는 여성들 약 1,260만명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약 3,600명 정도로, '''0.02%'''에 해당한다. 서울대 재학 시절 당시 여학생이기에 편협한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희호는 총학생회 사범대학 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았다. 엄청나게 활발하고 [[페미니즘|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기에, 교내에서 '다스'[* [[독일어]]로 'das'라고 쓰며, '중성관사' 역할을 한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기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내가 히히호호하고 크게 웃어서 이름이 이'희호'에요"라고 재치있게 소개했다고 한다.[* [[강원용]]의 저서 <내가 만난 이희호>에 발췌한 내용이다.] 또한 사회참여운동에 관심이 많아 [[연극]]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라는 연극을 공연할 때는 이희호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고, 연출도 다 했다고 한다. 항상 웃기는 역할까지 다 맡는 등 활달한 타입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한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피난길에서도 [[이태영]][*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적극적인 [[페미니즘|여성 운동]]을 펼쳤다. 1950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1952년에는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하였다. 여성문제연구원은 훗날 여성문제연구회로 명칭을 바꿨고, 훗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 1대 회장은 [[황신덕]]이었다.]을 맡기도 한다.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무렵, 미래 남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김대중]]과의 운명이 시작된다. [[1.4 후퇴]]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광역시|인천]]에 있던 해운회사 사장의 도움을 받는데, 바로 그 사장이 김대중이었다. 이후에 김대중이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기면서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지는데, 이때 처음으로 둘이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희호는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이 모임에 김대중이 간헐적으로 참석하면서 교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유학하는 동안 미국 [[감리교]]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여 [[공장 아르바이트|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스카릿대 대학원에서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 취득 후에 1958년 귀국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화여대 부총장 이희호.jpg|width=100%]]}}} || || {{{#ffc224 '''이화여대 부총장 시절의 이희호'''}}} || 귀국 후에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강사로 강단에 섰고, 이어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 연합회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맡으며 국내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장식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대중과 이희호의 결혼식.jpg|width=100%]]}}} || || {{{#ffc224 '''이희호와 김대중의 결혼식 사진'''}}} || 여성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와중에 1962년 5월 10일 김대중과 [[결혼]]한다.[* 참고로 결혼식 장소는 그녀의 외삼촌이자 대한민국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절차 마무리 및 [[1948 런던 올림픽]] 고문 등을 지냈던 사업가 [[이원순]]의 집 대청마루라고 한다.] 그것도 김대중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다. 김대중의 첫 부인인 차용애는 1959년에 사망했다.[* 차용애의 호적상 이름은 차용수.][* 김대중은 사망하기 전 완성된 자서전(2009년 판)에서 "과로사에 가까운 병사"라고 구술하였다. 연이은 [[낙선]]으로 궁핍해진 살림을 보태고자, 집에 미용 도구를 갖춰놓고 [[미용실]]까지 운영하면서 독한 약품에 많이 노출되던 게 쌓여서 탈이 났다는 것이다. 생모가 작은댁이었다는 사실까지 솔직하게 구술해 놓은 2009년 판 자서전 내용인 만큼, 신빙성 있는 출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용애는 약을 복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혼수 상태에 빠졌으며, 김대중이 부른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1980년, 당시 어용 언론이었던 [[경향신문]]은 차용애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선동, 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기사를 실어 김대중이 차용수를 음독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시절 경향신문의 대표적인 [[흑역사]]다.] 슬하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중 한 명인 [[김홍걸]]을 두었다. 3남 중 [[김홍일(1948)|장남]]과 [[김홍업|차남]]은 전처 소생이다. 이후에 이희호가 2살 연하의 김대중과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초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며 통탄했다고. [[YWCA]]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며 왜 (이희호의) 소중한 인생을 (김대중의) 초라한 삶에 맡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후일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한 이유를 묻자, "잘 생겼잖아요"라고 대답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대중과 이희호.jpg|width=100%]]}}} || || {{{#ffc224 '''단란한 모습의 이희호와 김대중 '''}}} || 사실 이희호의 자서전이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는 본래 민주운동가 [[계훈제]]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출신 엘리트인 계훈제는 재야의 유명인사로 반탁운동, [[4.19 혁명]],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 [[유신헌법]] 반대 등에 앞장섰다. 하지만 잦은 투옥 생활을 하게 되며 폐결핵이 심해지자 이희호는 해외 유학을 결정하였고,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하였다.[* 다만 이러한 과거 때문인지 김대중의 지지자였던 재미 교수 최기일의 자서전에 따르면 계훈제는 다소 김대중을 껄끄럽게 여겼으며, 1987년 당시 김대중을 지지하는데 거부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98 대통령 취임식.jpg|width=100%]]}}} || || {{{#ffc224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의 이희호'''}}} || 당시 재야인사였던 김대중이 군부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페미니즘|여성 운동]] 활동도 접어야 했다. 대신 남편의 기나긴 옥바라지와 내조, 민주화투쟁의 동지로 일생을 보냈으며,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비판자이자 조언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남편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70대 후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외계층 복지와 정책감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여성권익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젊었을 적 초심을 잃지 않고, [[김대중|부군]]의 정책공약에 정치적 관심에서 소외되기 쉬운 여성들을 위한 대책이 들어가게끔 도왔으며, 이는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여성가족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희호 김정은.jpg|width=100%]]}}} || || {{{#ffc224 '''2011년 사망한 김정일의 조문을 위해 방북하여[br]김정은을 위로하는 이희호'''}}} ||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당시 조문을 위해 방북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 사망 당시 북측의 조문단 파견에 대한 답방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희호와 함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동행했는데, 둘 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북한]]에서 조문을 왔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8년 [[문재인 정부]] 시절, 일명 판문점 회담으로도 불리는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2018 남북정상회담]]이 마무리된 이후 이희호는 [[문재인]]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받길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벨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넘기고 [[대한민국]]은 [[평화]]만 얻으면 된다는 대답을 했다. 결론적으로 이희호의 덕담은 실현되지 않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일시적으로 화해 무드에 들어갔던 당시 남북관계도 이희호 사망 이후 2020년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냉각되었다.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남북 평화를 바랐던 이희호의 행보를 돌이켜 본다면 여러모로 안타까운 대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