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희수(야구) (문단 편집) == 지도자 경력 == 1977년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의 창단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으나 1년 뒤인 1978년 [[김영덕]] 감독이 부임하면서 코치로 밀려났다. 이 때 4년간 코치로 경험을 쌓으면서 1980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도 일궜다. 1982년 초 [[김영덕]] 감독이 [[OB 베어스]] 창단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다시 북일고 감독직에 복귀해서 1982년~1983년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2연패와 1983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달성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84년 고향팀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로 부임해 [[강병철]] 감독과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1984년 한국시리즈|팀의 첫 우승]]을 일군다. 1984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는 3루 주루 코치로 활동했는데 [[유두열]]이 결승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자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유두열을 업고(...) 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1986년 [[강병철]] 감독이 롯데와 재계약에 실패하자[* 당시 롯데 [[프런트]]는 강병철과는 재계약할 예정이었으나, 이희수 대신 [[이광환]]을 수석코치로 영입하려고 했다가 강병철의 반발로 접었다. 그러나 이희수의 재계약 협상을 앞두고 강병철이 '''"희수 계약금을 애 과자값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강병철의 이 말이 곡해돼 전달되는 바람에 박종환 당시 단장과 [[신준호]] 당시 구단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특히 '과자값'이라는 단어가 [[롯데제과|모기업]]을 모욕했다고 오해하는 바람에 강병철과 이희수의 목을 동시에 날려버리게(...) 된다.] 롯데를 떠나 [[빙그레 이글스]] 수비코치로 부임했다. 그 시기의 감독이 김영덕, 강병철로 모두 그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감독의 변화와 상관없이 계속하며 중간에 잠깐했던 2군 감독직을 포함한 코치직을 장기간 수행할 수 있었다. 1998년 7월, [[강병철]]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한화 감독직에서 중도 해임되자 감독 대행에 부임해 시즌을 마무리하고, 그 해 11월에 정식으로 후임 감독에 부임한다. 1999 시즌은 양대리그로 치러진 첫 시즌인데, 단일리그 기준으로는 리그 4위에 불과한 성적이었지만, 양대리그 체제에서 크로스 토너먼트로 치러진 PO의 특성이 팀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바로 [[정민철]], [[송진우(야구)|송진우]], [[이상목]]으로 이어지는 막강 선발진과 최강의 마무리 [[구대성]]을 비롯해 [[장종훈]], [[이영우]], [[송지만]],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 등 신구 조화를 이룬 야수진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오프에서 4연승으로 [[두산 베어스]]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여기서 롯데를 상대로 4승 1패를 거둬 [[1992년 한국시리즈]]의 참패를 복수함과 동시에 이글스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 쥔다. 이 우승은 현재까지 빙그레-한화 이글스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이다. 다시 말해, '''1900년대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인 셈이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는 매직리그 3위로 추락하는데, 꼴찌였던 [[SK 와이번스]]는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를 가지고 시즌을 꾸리던 절대 약체였고, 따라서 이는 사실상 꼴찌라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전년도 우승에도 불구하고 재계약에 실패, 팀을 떠나게 된다. 여기에는 1999년 당시 일어난 한 사건도 영향을 끼쳤다. 1999년 5월 21일 경기에서 [[구대성]]이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판정에 불만을 품고 항의를 하다가 퇴장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경기 후에 이희수 감독이 당시 구심이었던 [[이영재(1968)|이영재]] 심판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그것도 야구공으로 폭행하였다. 상당히 불만이 컸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12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런데 당시 2위였던 LG와 7경기 차로 뒤지던 한화는 이때부터 치고 나가기 시작 결국 매직리그 2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당시 감독대행으로 경기를 지휘한 인물이 당시 수석코치였던 [[유승안]]이었다.] 가뜩이나 당시 프런트와 반목하고 있던 차에 2000년의 급추락은 프런트에 좋은 구실을 안겨주었다. 이희수는 원래 불 같은 성격 때문에 프런트에 책이 잡힌 상태였다고 한다. 98시즌 이후 프런트 독단으로 코칭스태프 구성과 [[노장진]] 트레이드가 이뤄질 때 이희수는 불만만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5월 출장정지 당시 감독을 대행했던 유승안이 좋은 성적을 내자 가뜩이나 좁던 이희수의 입지는 더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2000년에는 감독을 경질하고 완전 프런트 야구를 한다느니, 아니면 유승안을 감독으로 선임한다느니[* 당시 한화 이글스의 이남헌 사장은 [[강병철]] 감독을 시즌 중 경질한 전적이 있었다. 덕분에 이희수가 감독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만, 그랬기에 이희수라고 시즌 중에 안 자르리라는 법이 없었으니... 게다가 이남헌 사장은 강성으로, 프로야구 선수협 사태 때 구단측을 대표하여 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고의태업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서 결국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이희수는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유승안이 지도자 연수로 팀을 떠나며 감독직은 [[이광환]]에게 넘어간다. 한화 감독에서 물러난 뒤 모교인 성남고 감독을 맡으며 고교야구계에 복귀, 2004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준우승팀은 광주동성고였으며 3학년 이원석이 주장 겸 유격수, 2학년 한기주와 1학년 양현종이 투수였다.] 당시 제자였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고교야구 최초의 4연타석 홈런으로 이름을 날린 [[박병호]]이다. 2006년 지도자 은퇴를 선언하고 [[홍우태]] 코치에게 성남고등학교 감독직을 넘겼으며, 같은 해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시타로 나온 바 있다. 구대성의 은퇴식 당시에도 초대받아 참석했으며, 2011년에는 [[KBS대전방송총국|KBS대전]]에서 한화 이글스 라디오 중계 해설을 맡았으며, 한동안 [[한국야구위원회|KBO]] 육성위원장으로 일하다가 물러났다. 한국시리즈 우승 경력이 있는 감독 중 경력이 가장 짧았다. 1999년 당시 귀뒷부분에서 종양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결국 이듬해 수술을 했던 것.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하필 그때 건강상의 문제가 터진데다 성적 추락까지 겹치면서 재계약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410&aid=0000405042|#]] 이후 트레이 힐만 감독이 경력 2년만에 우승을 하고도 가족 건강 문제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되어 우승 감독중 최단기 감독 경력을 넘겨주게 되었다. [[2015년]] [[10월 1일]]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 대 [[한화 이글스]] 경기 전에 열린 [[송지만]]의 은퇴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밖에도 한화 이글스 관련 야구 다큐에도 종종 얼굴을 비춘다. 2018년 10월 19일 11년만에 열리는 한화의 포스트시즌 경기의 첫 번째 시구자로 참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