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휘소 (문단 편집) ==== 페르미 연구소 ==== 이휘소는 1973년 9월에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하였고, 이 해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자문 위원을 맡았다. 이 무렵에는 곳곳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는 1973년 5월 23일자로 그에게 물리학과 교수직을 제안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페르미 연구소에서도 이론 물리학 부장(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직을 제안하였다.[* 심지어는 이미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한 몇 개월 후인 11월 29일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게이롤드 P. 및 메리 루이지 한웰 석좌교수직(Gaylord P. and Mary Louise Harnwell Professorship)으로 초빙한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휘소는 [[양전닝]]과 상의한 끝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하기로 했다.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면서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도 겸임하기로 했다. 봉급은 페르미 연구소에서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원한다면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는 1966년 8월 31일부터 이휘소를 휴직 처리해주며 1974년 9월 25일부터 물리학과 선도 교수(leading professor)에 임용하는 특별 대우를 해주어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였다.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재직하며 이휘소는 이곳에서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하고 실험 계획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1974년 6월부터는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과학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 이 임기는 1978년 8월까지였다. 1974년에 이휘소는 영국 런던에서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 개최된 제 17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는 전체 회의의 연사로 초청되어 전약 이론의 그 때까지의 발전 상황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이 무렵 와인버그의 1967년 논문은 상당히 유명해져서 전약 이론은 일반적으로 '와인버그 이론'이라고 불렸지만, 이 회의에서 이휘소는 전약 이론에 대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하고 자신의 발표에서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 불렀다. 이후 학계에서는 이휘소의 명명을 존중하여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고, 이 덕에 [[압두스 살람]]은 [[스티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와 함께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됐다. 1974년에 이휘소는 20여 년 만에 잠깐 귀국을 한다.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이었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 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박정희의 독재 정권이 계속되는 한은 결단코 대한민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던 이휘소가 어떻게 USAID의 평가위원 위촉을 수락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한민국 측에서 추천하였다는 이유로 미 [[국무부]]가 설득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최소한 한국의 과학 교육 만큼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서 귀국한 과학자가 억류된 사건이있었는데[* 카피차 소비에트 연방의 물리학자로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가 있다. 그는 191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에 [[대영제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자연스럽게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수한 인재인 그가 모국에서 연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련에 억류될 것을 염려한 카피차는 신변 보장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절했는데 스탈린은 이에 직접 신변 보장 각서를 써주면서까지 모국 방문을 종용했다. 그렇게 하여 카피차는 매년 여름 스탈린의 각서를 받고서 소련을 방문하게 됐는데 어느 해에는카피차의 여름 방문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신변 보장 각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사관 관리는 행정 처리가 늦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니 걱정 말고 우선 소련으로출발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미 여러 번 소련을 왕래한 바 있는 카피차는 별 의심 없이 귀국길에 올랐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결국 소련에 억류되고 말았고 꼼짝없이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연구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휘소는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박정희 독재정권 하의 대한민국 방문에 대해 더더욱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1973년에 모처럼 일본 교토 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박정희 독재정권을 경계하여 일부러 귀국하지 않고, 다소의 불효이긴 하나 모친을 일본에 모셔서 그 곳에서 모자 상봉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미국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카피차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대로 이휘소에게 손을 뻗지는 못할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이휘소는 만전을 기하여 신변 보장이 확실한 [[주한미군]] [[용산기지]]옆의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기로 하였으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자신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동안 만에 하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손을 댈 경우 반드시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 곳들의 연락처를 페르미 연구소의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두고서야 겨우 대한민국으로 떠났다.[* 그는 학술회의, 연구방문 등으로 외국여행이 빈번했지만 이 모국 출장 건처럼 직접 세심하게 챙긴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됐으며, 또한 이 해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