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휘소 (문단 편집) == 대중매체 == 사실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루머는 당대에도 있긴 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사고가 일어난 지 딱 2주 지난 6월 30일,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의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고흥문]] 의원이 이휘소의 사망에 “어떤 흑막이 개재되어 있지 않느냐”며,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수두뇌,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두뇌를 늘 정부는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703211503261&code=116#c2b|#]] 헌데 세월이 지나 90년대가 되어 소설가 [[김진명]]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에서 그를 이용후 박사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다.[* 정확히 말하면 김진명은 이휘소 본명을 그대로 무단도용했다. 이후 유족에서 항의하여 이름을 바꾼 것. 그리고 이 탓에 명예훼손 소송을 피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이용후는 제3공화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의 중심 인물로 핵무기 설계도를 수술한 다리뼈에 숨겨서 들어오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그의 죽음도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음모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휘소를 핵물리학자 내지 핵개발과 연관지은 것은 김진명보다 공석하(1941~2011) 교수가 먼저로 그는 1989년에 '핵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소설을 출판했다.[* 생전에 소설의 성공을 위해서 20%는 '''픽션'''화할 수밖에 없다고 KBS '이휘소의 진실 2부 - 벤자민 리의 유산'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황당한게 사실 이휘소 박사는 애초에 주전공 분야가 소립자 분야로 '''핵무기와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었다'''. 차라리 서울대 시절 전공인 [[화학공학]]이 핵무기의 원료 우라늄을 뽑아내어 정제하는데 더 중요한 기술들을 다룬다.] 이에 이휘소 유족의 반발이 있자 다시는 출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김진명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내자 1993년 약속을 깨고는 《소설 이휘소》를 출판하였다.(...)[* 김진명은 공석하의 소설을 읽고 참고했다고 하였다.][* 이러면서 공석하는 1994년, 김진명을 상대로 도서제작 및 출판금지를 청구하였는데 그 이유로 자신은 유족 때문에 핵물리학자 이휘소를 절판하고 김진명에게 인용하면 곤란하다고 하였으나, 그가 출판하여 제소를 당해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반면 김진명 측은 인용을 흔쾌히 수락하지 않았냐며 공석하도 '소설 이휘소'로 돈을 벌지 않았냐며 반론하였다. 해당 재판은 1997년에 공석하가 패소하면서 끝났다.] 이후 2010년 '로스트 이휘소'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이 진실이라 믿는 몇몇 사람들이 있는데, '''픽션은 픽션'''일 뿐으로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소설]]을 보고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위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휘소 박사는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싫어했다.] 이 소설들은 이휘소의 유족들이 소설의 내용에 강하게 반발해 출판금지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다. 당시 군사정권의 '자주국방'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소설이 허위임은 인정하였으나 소설의 내용이 이휘소의 명예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 명예훼손과 출판금지는 기각했다.[* 서울지법 1995. 6. 23., 선고, 94카합9230.] 정작 군사독재정권과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이휘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이런 법원의 판결에 매우 실망한 이휘소의 아내 심만청은 이후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이는 KBS 이휘소의 진실에서 KBS의 인터뷰 요청을 강하게 거부함으로써 그대로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2022년 3월 16일자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서도 다뤄졌다.[[https://youtu.be/414s5taRWzw|#]] 대부분의 반박 증거들은 상기된 내용들이 언급되었다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는데, 그건 바로 당시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제2비서실 비서관 김광모의 증언이었다.[* 김광모는 이휘소는 물론 당시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오원철]]과 함께 서울대를 다녔다.] 김광모는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고 나온 핵 연료로 핵무기를 만들고, 이를 위해 핵 연료 재처리 기술을 개발한다는 계획을 박정희가 직접 세웠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휘소 박사에게 보낸 서신'을 제작진에게 건네받자 '''"다 새카만 거짓말입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박정희가 '나라가 달려있다'라고 호소하는 식의 친서를 개인에게 보낼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휘소는 순수 물리학자이자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한 학자였지, 핵무기 개발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휘소에 대한 모욕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방송에서 이 음모론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한마디로 정리, 종결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