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휘소 (문단 편집) == 대한민국 관련 == 이휘소는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놓치 않았다. 1971년 당시 한국과학원 부원장인 [[정근모]] 박사는 한국 물리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물리학 여름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며 이휘소 박사를 초빙하려 하였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이러한 시도에 대한 이휘소의 답신 또한 긍정적이었지만, 그해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둘러싼 야당의 부정선거 의혹 제기와 박정희의 위수령 선포를 보며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였다. 정근모 박사는 정권과 국민을 따로 생각해 한국과학발전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1972년 초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모두 없었던 일로 하게 된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여름 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여름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강주상, 신동아 1993년 12월호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中]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그와 친한 과학자였던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는 당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의 수락을 이휘소에게 권유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참고로 박정희는 이휘소가 사망한 1977년 이후인 1979년까지 정권을 유지하다 [[10.26 사태]]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휘소가 주도하는 여름학교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4년에 이휘소는 20여 년 만에 일시 귀국을 하게 됐다.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이었다. 이것이 이휘소가 유신 정권 치하의 한국을 방문한 유일한 사례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그러나 이휘소는 [[소련]] 학회에 참여한 러시아 출신 과학자들에게 벌어진 것 같은 납치를 두려워하여 한달 내내 미 대사관 직원 숙소에만 머물렀다. 1977년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타계한 후 정부에서 훈장을 추서했다는 것을 "이휘소가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본래 정부에는 '한국에 직접 공헌한 바 없다'며 소극적이었던 것을 국내 과학계의 거듭된 탄원으로 성사된 것이고, 이마저도 유족들이 '유신 정권에 대한 고인의 비판적 입장'을 이유로 거부한 것을 이 박사의 모친을 통해 겨우 수여했다. 게다가 훈장 자체도 3등급인 동백장. 정부가 핵개발의 핵심 멤버로 여기는 중요 인사였다면 최고등급인 무궁화, 혹은 그 다음인 모란장 정도는 주었을 것이다.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1941.8.24. ~ 2017.1.6.)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는데, 그는 이 무렵 [[스토니브룩 대학교]]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당시에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그때 이휘소는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강주상 《이휘소평전》 발췌)강주상 교수는 이휘소의 제자 중 한명으로 1981년부터 2006년까지 고려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http://webzine.kps.or.kr/contents/data/webzine/webzine/15271468421.pdf|여기]]에 따르면 손동철 교수(경북대)와 함께 우리나라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의 선구자였다고.][* 이 박사가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핵무기 개발에 관련했다는 식의 [[음모론]]은 이 문장 하나로 반박된다. 당연히 북한도 마찬가지인 소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