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효석 (문단 편집) === 순수 문학으로 === [[1930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https://kkks1.tistory.com/1550|졸업한]] 이효석은 [[1931년]] [[7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성동본인 나남[[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전주 이씨]] 이경원과 결혼해 [[경기도]] [[경성부]] [[수송동(종로구)|수송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종로구)|수송동]]) 46번지에 새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1929년]] 촉발된 [[대공황]]과 뒤이어 닥친 불황의 여파속에 작품 활동을 계속 하던 이효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은사인 쿠사부카 소지(草深常治)[* [[1924년]] ~ [[1926년]], [[경성제일고보]] 교유로 근무했으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1927년]] [[경기지방경찰청|경기도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했으며, [[1928년]] [[3월]] [[중앙경찰학교|경찰관강습소]] 교수 겸 [[조선총독부]] 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유진오]]의 '''젊은 날의 초상'''에 실린 [[1927년]] [[3월 27일]] 자 일기에 나오는 K선생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1927년]] 당시 조선 생활 22년 그리고 고등관 6등의 직위에 있었다. 출처 : 검열연구회, <<식민지 검열: 제도 텍스트 실천>>]의 추천으로 [[1931년]] 하반기 또는 [[1932년]] 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산하 도서과 검열계 서기로 취업하기도 했는데, 양심의 가책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보름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평론가 이갑기(李甲基)[* 융희 2년([[1908년]]) 생으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사회주의 계열 문인이다. 평론가로서 민족주의 문학론을 발표했고, [[임화]], [[백석(시인)|백석]]과 마찬가지로 해방 뒤에 월북한 탓에 한국에는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나간 듯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말이 좋지는 못했었던 모양.]에게 "네놈도 결국은 개가 다 되었구나!"라고 매도당한 데 충격을 받아 사직했다는 일화가 전하나, 이효석의 경성제대 영문학전공 2년 후배인 조용만(趙容萬, 1909 ~ 1995)[*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기자, 문학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 전공 졸업 후 《매일신보》 기자, 《경향신문》,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국도신문》 주필과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초기 영문학자 중 한 사람으로 다양한 영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3~1975)로 재직하였다.]의 회고로 보아 이는 낭설일 개연성이 높다. 화려한 도시 [[경성부]]에서의 비참한 도시 빈민의 모습을 그린 대학 시절의 등단작 <도시와 유령>, 그리고 소련을 그리며 가고자 하는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으로 대표되는 경향문학 등 활동 초기 이효석은 동반자 작가로 분류될 만큼 사회주의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1932년]],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가 경성공립농업학교(現 [[서울시립대학교]]와는 무관한 학교임) [[영어교사]]로 취직해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뒤로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향토적·이국적·성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특이한 작품세계를 시적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오리온과 능금>(1932)을 기점으로 하여 <돈(豚)>, <수탉>(1933) 등은 이 같은 그의 문학의 전환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작품들이다. [[1933년]] [[8월]]에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 전공 후배인 조용만, [[최재서]] 등과 함께 순수문학단체를 표방한 '[[구인회]]'에 창립 멤버로 가입하여 순수문학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다만 [[경성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지방인 함북 [[경성군]]에 거주하면서 구인회에 자주 참여하지는 못하여 점차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asan_ihyoseok_samsipdae.png|width=100%]]}}} || ||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재직 시절 || 이효석은 [[1934년]], [[숭실대학교|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48번지(現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로 이주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인 [[구제전문학교]]의 교수 직위에 앉은 셈으로, 이제야말로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추게 된 이효석은 [[1936년]]에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8년]],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고 나서, 숭전의 시설을 활용해 세워진 [[김책공업종합대학|대동공업전문학교]](現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수를 맡았다. 지인들 앞에서 이효석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 [[1939년]]과 [[1940년]] 두 차례 [[만주국]] [[헤이룽장성|빈강성]](濱江省) [[하얼빈시]]를 여행하고 이 유럽풍 도시에서 《벽공무한(碧空無限)》, 《하얼빈(哈爾濱)》 등의 작품을 썼다. 같은 해 차남 영주가 태어났으나, '''[[1940년]]에 안타깝게도 처와 자식 둘 다 병으로 연이어 세상을 뜨고 만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 여러 번 만주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건강하던 그 역시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이듬해인 [[1941년]], 뇌막염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다. 그 자신도 병마로 고생하던 이효석은 [[1942년]] 5월, [[평양의학전문학교|평양도립병원]]에 입원했으나 불치의 진단을 받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25일, 평안남도 평양부 기림정(現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자택에서 향년 35세의 나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http://db.history.go.kr/id/su_013_1942_05_25_1030|사망했다]]. 그의 사후 시신은 그의 부친 이시후에 의해 모친과 함께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1972년]], [[영동고속도로]]의 건설공사로 인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의 고속도로변으로 이전되었다가, [[1998년]] [[9월]]에 [[영동고속도로]]의 확장공사[* 이미 용평초등학교 이전 공사까지 겹쳐서 진입로를 만듦에 따라 묘소의 가장자리가 깎였는데, 원래 진입로는 예정에 없었으나 주민들의 요구로 더 깎아냈다.]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다만 이장 당시엔 이를 두고 유족들과 지역 주민 간의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0386|갈등이 있어서]][* [[1998년]] [[4월]] 한식 때 묘소 훼손 광경을 본 장녀 이나미 측은 평창군의 비협조적 태도 탓에 분노해 이장을 추진코자 하자, 지역사회 측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유족 측이 밤중에 이장할 수밖에 없었고, 미술사학자 [[유홍준]]도 이를 비판하는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19980830/7372976/1|칼럼을 냈다]]. [[2021년]] [[11월 11일]], 유족 측이 '가산 이효석 선생 묘지 이장 추진위원회'와의 협의가 타결되면서 봉평으로 이장할 수 있는 길이 [[https://m.yna.co.kr/view/AKR20211111066700062|열렸다]]. 그리고 동월 [[11월 19일]] 이효석 부부의 유해를 평창 이효석문화관 달빛문화언덕으로 이장하였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87/0000869088|참조]]. [[1982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