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홍장 (문단 편집) == 여담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0px-China_imperialism_cartoon.jpg|width=100%]]}}}|| ||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르 프티 주르날, 1898년) || * 위의 유명한 풍자화[* [[청나라]], [[제2차 아편전쟁]] 문서에서도 이 그림을 볼 수 있다.]에서 뒤에서 두 팔 든 채 손톱 세우고 격분하는 인물이 바로 이홍장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종이 호랑이임이 입증된 중국을 [[대영제국|영국]], [[독일 제국|독일]], [[러시아 제국|러시아]],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일본 제국|일본]] 등 열강들이 갈라먹는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충격과 공포]]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위의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 그림에 중국을 갈라먹는 열강의 대표로 나온 인물들은 왼쪽부터 [[빅토리아 여왕]], [[빌헬름 2세]], [[니콜라이 2세]], [[마리안(프랑스)|마리안]], [[사무라이]]이다. 또 이홍장의 [[손톱]]이 긴게 특징인데, 당시 청나라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은 육체노동을 경멸하여 저렇게 손톱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다. 서태후 사진을 보면 긴 손톱을 보호대로 보호하고 있는 사진도 많다.][* 1990년대 후반 [[베스트셀러]]인《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의 지은이인 한호림이 후속으로 쓴《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국어》라는 책자에서 저 사진의 말풍선 설명에서 [[구한말]] 역사를 잠깐 설명하며 이홍장이 [[조선]]을 먹으려는 것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오히려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처럼 청나라의 [[국력]]으로 통치가 어려운 지역은 과감히 [[러시아]]에 할양하고 국력을 정비하는 게 옳다고 보았을 정도로 [[팽창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자국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자국의 능력을 넘어서 직접 먹으려 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의 조선 병합 의견을 비현실적인 의견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이홍장이 [[조선]]을 먹으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장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나 [[근대화]]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는 조선이 [[서양]]이나 [[일본]]에 넘어가는 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의 영향권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임오군란]] 때는 [[명성황후|민비]]의 요청을 받아들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기도 하고, [[갑신정변]] 때는 조선의 내정에 개입해 일본의 입김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쿠데타]]를 분쇄했다.] 그러나 [[청나라]] 땅이 [[대륙의 기상|너무 큰 데다]] 유럽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폴란드 분할|폴란드처럼]] 갈라먹지는 못했다.[* 후대에 대놓고 [[중국]]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같은 이유로 가장 승승장구할 때조차 중국의 동부 해안 지대만 간신히 차지했다.] * 그래도 [[19세기]] 청나라 제국의 나름 개혁 의지가 있던 실권자였던지라 서구권에서도 꽤 유명했는지, 여러 인사와 만남을 가졌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와도 만났는데, 그랜트는 이홍장을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글래드스턴]],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급으로 고평가하기도 했다. * [[파일:external/destiny.xfiles.to/%E6%9D%8E%E9%B4%BB%E7%AB%A0%E5%92%8C%E4%BF%BE%E6%96%AF%E9%BA%A5.jpg]] 둘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만나기도 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503/3/70070000000503/20031211/8009931/1|면담 내용 기사]][*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503/3/70070000000503/20031211/8009931/1|이 동아일보 기사]]를 패러디한 "[[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s-2|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팬픽이 존재한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Li_Hung_Chang%2C_Lord_Salisbury%2C_Lord_Curzon.jpg|width=400]] 왼쪽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외교의 거물로 대영제국의 총리를 지낸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후작, 오른쪽은 조지 커즌 후작.[* 폴란드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할 때 [[폴란드]]의 국경을 확정한 [[커즌 라인|커즌 선]]을 그었다.] * 어마어마한 [[장신]]이였다. 위의 사진 속 오토 폰 비스마르크,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조지 커즌 세 사람 모두 193cm의 장신인데,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이홍장이 세 사람보다 작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며[* 로버트 개스코인세실도 나이가 들면서 키가 좀 줄어들었을 것이고, 대두(...)인 데다가 조금 구부려있는 상태로 찍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팔순 노구였음을 감안하면 키가 꽤 줄었을 것이다.], 이홍장과 친했던 미국인 찰스 다니엘 테니의 회고에서도 [[https://collections.dartmouth.edu/teitexts/tenney/diplomatic/ms794-011-diplomatic.html|190cm 정도의 장신]]이었다고 언급되며, [[니콜라이 2세]]도 러시아를 방문한 이홍장을 만난 후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다고 일기에 썼다. 이런저런 증언들과 위의 사진들로 종합해 봤을 때 이홍장의 키는 180대 후반 정도로 추정된다. 놀랍게도 [[만주족]]이나 [[몽골족]] 등 북방민족이 아닌 남방민족인 한족인데도 당대 서양인에 비해서 꿇리지 않았다. * 40세가 넘은 나이에 [[영어]]를 혼자서 학습하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와 통역없이 영어로 대화하였고 미국과 영국에 방문하고서도 여객선에서 현지인들과 영어로 막힘없이 대화하였다. 영어에 능숙해진 이후로는 영자신문을 읽으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 당시 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만큼 조선 사람들도 적잖이 만나 봤는데 그 중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었을 때 만났는데, 이홍장은 [[반란]]의 수괴인 흥선 대원군을 비록 의전상 상급자[* 아무리 관직이 높다 한들 신하 국가의 군주의 친아버지인 대원군보다 이홍장의 의전 서열이 높을 수는 없다.]라 정중히 대하긴 했어도 심문하는 입장이었다. 이홍장은 흥선대원군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학하다"고 평가했다가 1884년 올린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들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은 효웅이다. 그의 재기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 [[흥선대원군]]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형 [[흥친왕|이재면]]에게 보낸 한글 편지([[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6/26/0200000000AKR20120626193800005.HTML|#]])에는 '니즁탕'이라는 호칭으로 거론된다. '니'는 성씨 '이(李)'이고 '즁탕'은 '중당(中堂)'으로 여기서 '중당'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 고종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유원]]과 서신으로 교류했다고 한다. 조선에 [[미국]]과 수교하라고 권고한 것도 이 서신에서 비롯된 일이다. * 비록 [[청일전쟁]]으로 인해 실권을 잃었다지만 특출한 [[외교]]적 수완은 계속 인정받고 있었기에 [[시모노세키 조약]], 청 - 러 밀약, [[신축조약|베이징 조약]] 등 굵직한 대외적 협정마다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나섰다. 평생을 현역으로 활약한 셈. 80세 가까이 이르는 인생을 청나라 부흥에 전력 투구했으며 그럼에도 결국 그 몰락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역사]]상의 풍운아였다. 세대로 따지자면 청나라의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아편전쟁]] 때 그는 약관 17세에 불과했다. * 이홍장의 사후 [[위안스카이]]가 입지를 계승하여 훗날 청나라 왕조 멸망 후 중국 최고의 [[군벌]]로 부상한 [[북양군벌]]을 조직하게 된다. * 저서로는 《이문충[* 이홍장의 시호가 문충(文忠)이다.]공전집》이 있다. * 그의 조카 [[리징시]]는 청나라 시절 운귀총독을 지냈으며 [[중화민국]] 10대 [[국무총리]], 재정총장을 역임한다. * 그의 무덤은 [[고향]]인 [[허페이시]]에 있다. 라이벌인 [[좌종당]]과 마찬가지로 이홍장의 무덤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헤쳐졌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이후 이홍장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생가와 [[무덤]]을 복원하였으며 생가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되었다. * [[파일:大清銀行_100_Dollars_-_Ta-Ching_Government_Bank_(1909)_01.jpg]] 청나라가 [[멸망]] 직전에 발행했던 [[지폐]]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순친왕]].] * '''[[조선]]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이 [[일본]]의 무력 시위에 당황해 청나라 조정의 의견을 물었고 이홍장은 조선에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권고하면서도 일본이 종주국인 청나라를 대신해 조선에 주도권을 행사할까 봐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통상 조약을 주선했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이 번속국인 조선을 아예 병합해 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지만 이홍장이 비현실적이라며 물리쳤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으로도 조선의 병합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는 이홍장이 [[정치]]적으로도 조선을 별개의 [[나라]]로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관의 국가로 인지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홍장은 조선을 무리하게 병합하기보다는 기존의 번국 형태로 유지시키고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청나라에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중원의 [[통일]] 왕조들은 [[한나라]]와 [[당나라]]처럼 한반도 일부를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 한나라의 [[한사군]]과 당나라의 [[도호부]]. 다만 설치 이후 얼마 못 가 축출되거나 중앙 정부와 분리되어 현지 한민족과 동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이후로는 조공 관계를 맺고 상국으로 군림하는 정도에 만족했지 아예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희제]] 시절에도 [[대만]]을 복속하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강희제는 조선이 [[중국]]과는 풍속이 다르다며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한족]] [[왕조]]였고 당시 대만도 이미 한족들이 대거 이주한 상태였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그의 외증손녀는 [[장아이링]]이라는 소설가인데, 중국 현대문학사에서는 유명한 [[루쉰]]만큼이나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한국에서는 후기에 쓴 단편 [[색계]]가 영화화 되어 나름대로 히트를 쳤는데, 원작자 장애령이 바로 장아이링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 [[쑨원]]과 [[의사소통]]이 전혀 안 돼서 애 먹은 적이 있다. 쑨원이 [[광동어]]만 쓸 줄 알았기 때문. 중국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쓰이는 언어들을 [[중국어]]의 [[사투리]]로 취급하지만, 중국어는 단일 언어라기보단 [[방언연속체]]로 이루어진 제어(諸語)이기 때문에 외국어처럼 서로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 방언도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