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홍장 (문단 편집) === 집권 === 1870년 [[톈진]]에서 반(反) [[기독교]]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 영국 - 미국 가톨릭 선교사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발하자, 이홍장은 증국번과 함께 프랑스 외무장관과 협상을 한다. 증국번을 이어 직례총독으로 임명되고, 북양통상대신과 문화전대학사를 겸임한다. 북양통상대신으로써 외교업무를 전담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접하게 된다.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중개 [[서태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독일, 영국 등으로부터 대량의 철갑함,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입하여 당대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를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주독 청국공사 [[이봉포]], 허경징, 기술자 서건인, 서도 부자 등의 인맥을 육성하였다. 같은 양무파였지만 정적이기도 했던 [[좌종당]]과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좌종당은 [[영국]] - [[프랑스]] - [[미국]] 같은 해양 세력보다는 북방의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것을 주장했고(= 새방), 이홍장은 러시아보다는 영 • 불 • 미가 더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아(= 해방), 해군력에 힘을 쏟았다. 이홍장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영국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로써 [[그레이트 게임|국제적 안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