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홍장 (문단 편집) === [[의병]] 활동 === [[홍수전]]에 의해 한족이 중심이 된 [[태평천국]]의 대란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혁신적인 주장을 두려워 한 지배 향신층은 이를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은 이미 18세기 말 [[백련교도의 난]] 때 무력함이 입증된 상태였으며, 태평천국 진압에는 향신층이 조직한 [[의병]]들이 주로 나섰다. 그렇다고 관군이 아예 논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 팔기군은 높은 전투력으로 유일하게 실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부 정벌에서 막강했던 팔기군은 50년도 안 되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의병을 조직한 사람 중엔 [[증국번]]도 있었다. 증국번의 의병은 "상군(湘[* [[후난성]]의 약칭이 '상(湘)'이다.]軍)", "회군(淮[* [[안후이성]]의 약칭으로 공식적으로는 '환(皖)'을 쓰나, [[화이허]](淮河)를 따라 '회(淮)'라고도 종종 쓴다.]軍)"이라고 한다. 이홍장은 이들을 물려받으면서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군벌이 되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증국번은 이홍장을 광서성 의병장 강충원에게 천거했다. 이홍장은 문관 출신이기는 했지만 태평천국 진압에서 발군의 진압 역량을 보여줬다. 태평천국 이후 [[중원]] 일대를 쉽쓸었던 반청 운동으로, 태평천국처럼 특정한 이념은 없었고 [[마적]]과 별로 다를 바도 없었던 [[염군]](捻軍) 진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54년에 강충원이 사망하고, 복제가 안후이의 순무로 부임한다. 이홍장은 자신의 고향에서 모집한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상하이시|상하이]] 수비 등에서 공적을 올렸고 전후 1등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때 [[쑤저우시|쑤저우]]에서 협상 후 자진항복한 태평군 병사들을 모두 학살하는 사건도 벌였다. 이 학살 이후 항복 협상을 받아낸 조지 고든[* 생몰년도: 1833년 ~ 1885년] 상승군 대장[* [[용병]]부대이지만, 본인은 고결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파쇼다 사건]]을 참고할 것.]이 크게 분노해 이홍장을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고 한다. 처형 자체가 잔혹한 탓도 크지만, 항복 협상 자체가 고든은 태평군 병사들의 생명과 신원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무혈 항복을 받아줬는데 처형이 벌어졌으니 고든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태평군 포로 학살은 이홍장만 벌인 게 아니라 대다수의 청군 지휘관들도 했으며, 원인은 태평천국 점령지에서의 만주족 학살로 인해 눈이 뒤집힌 청나라 조정의 불관용 방침이 컸다. 1858년에 복제의 지도력에 실망한 이홍장은 증국번과 함께 태평천국 진압에 힘쓴다. 1864년에 공적을 인정받아 황마괘[* 고위 관리들의 황색 제복]를, 태자태보, 일등숙의백의 작위를 받고, 안후이 성의 순무로 임명된다. 1866년에 [[염군]] 진압을 지도해 협판대학사와 호북호남총독으로 임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