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형익 (문단 편집) == 행적 == [[예산군|대흥]] 사람으로 유응형의 어머니에게 침을 놔줬다고 하며, 당시 지방에서 번침[* 침을 불에 담가 놓는 것]으로 유명해진 뒤 1633년에 내의원이 추천해서 어의가 되었고, 인조는 그를 신뢰해서 10여 년 동안 곁에 두고서 자주 번침을 맞았다. 왕의 수석 주치의로서 일한 것이다.[* 인조가 이형익을 신뢰한 것은 확실하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은 상태에서 그가 병에 걸렸는데 이 때 봉림대군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일을 이형익에게 맡겼다. 당시 인조는 원래는 소현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에게 돌아가야 했을 후계자 자리를 어거지를 써가며 봉림대군에게 줬고 그 과정에서 신하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던걸 감안하면 봉림대군이 병에 걸린 것은 크나큰 위기였기에 반드시 명의를 붙여줘서 치료했어야 했는데 그 때 붙여준 의원이 이형익이었으니 신뢰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봉림대군은 이형익의 치료를 거부했고 신기하게도 얼마 안 가서 그냥 몸이 나았다고 한다.] 이형익의 번침술에 대해서는 대신들이 사술이라 여겨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고, 1645년에 병을 치료할 일로 소용 조씨의 어머니 집을 왕래했고 이 일로 추잡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1648년에 김포군수에 임명되었고 1649년에 [[인조]]가 앓아 누워서 이형익이 평소 그래 왔듯이 침을 놓았으나 직후 인조는 사망했다. --은근히 [[킬러]]다.-- 주위에서 이형익을 사형에 처하라고 탄핵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형익은 [[경원군|경원부]]로 유배를 갔다. 1651년에 [[장렬왕후]]가 위독하자 특명으로 사면받아 부름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