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현상 (문단 편집) === 최후 === 한편 [[이승만]]은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 없고 지리산의 안정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시 이현상 한 사람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죽하면 이현상이 축지법을 쓴다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이에 이현상을 잡으면 1계급 특진 시켜준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내 빨치산들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어느곳에서도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종료될 때까지 북한은 빨치산에 대해서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대신 빨치산들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 지시를 보내왔다.[* 남부군을 쓴 이태는, 북측의 지령은 대부분 공작원이 도보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빨치산들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어서 하산이 어려운데다가 경찰이 잔존 대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1953년 8월 6일자로 북한에서 남로당 최고 간부 12명을 일제히 숙청하고 그 중 이승엽 등 10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김일성의 정적인 남로당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5지구당 위원장으로 남로당 고위간부이자 산하에 남부군, 전북도당, 전남도당, 경남도당을 두고 이끌던 이현상 역시, 1953년 9월 6일자로 김일성 절대지지파인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등에 의해 모든 직위를 박탈 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 되었으며, 무장 해제당하고 반감금되었다. 이후 남부군 사령부 요원들을 찢어져서 각 도당으로 분배되었고, 남부군 직계 부대이자 5지구당 경호부대였던 김지회 부대는 995 부대로 개칭 당하고 전남도당 구례군당 산하 일개 부대로 격하 되었다. 이후 이현상은 경남도당으로 이송되어 가도록 예정 되었다. 1953년 9월 4일. 제5지구당 기요 부과장 겸 박영발 전속 의무관 이형련이 전투경찰 2연대 사찰유격대에게 체포되었다. 연대장인 [[차일혁]] 총경이 "이현상은 (소문대로) 월북했는가? 아니면 지리산에 있는가?"하고 물어 봤을 정도로 이현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형련은 5지구당의 내분에 질려 먼저 원래 소속지인 전남도당으로 이동중이었다.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치료를 거부하고 죽으면서 5지구당에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있다는 것과 이현상이 아직 지리산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953년 9월 6일에는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 7명 중에서 2명인 김은석과 김진영이 체포된다. 그 둘은 5지구당에서 이현상을 숙청한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는 상태라 몽땅 불어 버린다. 즉 제5지구당은 해체되었고 이현상은 개인 경호대 역시 해체된 상태로, 홀로 감금되어 경남도당으로 이송 대기중이라는 초특급 정보였다. 이 둘은 2연대 수색대(사찰유격대)로 편입된다. 수색대는 대장인 김용식 경사 등 31명 중 한 사람을 빼고는 전원이 빨치산 출신이었다. 김용식은 유일한 정식 경찰이었는데, 조선대학 출신으로 덕유산지구 적상산에서 부하 15명을 이끌고 귀순하였다. 이현상의 호위병이 제공한 귀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서전사)는 사령관 [[김종원]]의 명에 따라 1953년 9월 13일자로 작전명령 9호를 발동한다. 바로 이현상 체포작전이었다. 당시 군경은 더 이상 합동작전을 하지 않고 남부경비사령부(남경사, 육군 소속)와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서전사, 경찰 소속)로 나뉘어 각자 경쟁을 하면서 작전하였다. 몇 만명을 동원해서 싸워야 할 빨치산 부대도 없는 상황에서 상호간에 경쟁심을 유발하겠다는 것인데, 실전에서는 정보 공유가 전혀 안 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경찰은 이현상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군부대가 지리산 빗점골에서 철수하는 1953년 9월 17일까지 작전을 연기하였다. 그리고 군부대가 철수하는 17일부터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현상 호위병까지 포함하여 33명이 된 2연대 수색대는 17일 23시부터 매복을 시작했는데, 다음날 18일 11시경 매복조 중 하나가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 3명을 포착하여 그 중 1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하였는데, 그 2명 중 1명이 바로 이현상이었다. 이현상은 도주하였으나, 18일 토벌대가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참고로, 이현상의 죽음에 관해서는 후술하다시피 경찰이 사살했는지, 육군이 사살했는지의 공적 싸움이 있었고, 결국은 경찰의 공적이라 결론이 내려졌으나, 이 결론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다. 시신은 방부처리 후 서울로 이송되어 명동에 소재한 경찰병원에 안치되었다. 이때 이현상의 고향([[금산군|금산]]) 친구인 정치가 [[유진산]], [[임영신]] 등이 와서 시신을 확인하였다. [[유진산]]은 특히 예전부터 이현상을 전향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고집을 꺾지 못했는데, 시신으로 돌아온 이현상을 보고 "현상아, 너도 늙었구나?"라고 했다는 [[https://www.ajunews.com/view/20180107142755042|일화]]가 유명하다. 이후에는 "공비 두목의 죽음"으로 창경원에서 20일간 전시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에서 다시 작전지역인 하동 화개장터로 시신이 내려왔는데, 시신을 인수할 유족을 찾기가 어려웠다. 고향 [[금산군|금산]]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숙부마저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며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가 좌익 활동을 하여 남한의 가족들이 얼마나 고초에 시달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http://www.ddanzi.com/index.php?mid=free&statusList=HOT%2CHOTBEST%2CHOTAC%2CHOTBESTAC&page=2&document_srl=592265902|한민족의 비극 - 남부군 이현상, 토벌대장 차일혁]] 결국 서전사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1953년]] [[10월 8일]]에 연대본부 옆 섬진강변에서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한 후, 그의 화이바에 백골을 빻아서 강물에 뿌려줬다. 아울러 하늘에 권총으로 예포 3발을 쏘며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 때문에 군 토벌대 측에서는 차일혁 총경이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경찰 내부에서도 어떻게 빨치산의 장례식을 치러줄 수 있냐며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서전사 제3연대장 방득윤 총경도 백운산 토벌작전에서 경남도당 작전주임을 사살한 뒤에 화장해줬고, 서전사 제5연대장 정인주 총경도 이현상의 장례를 정중히 치러주는데 동의했다고 한다. 공식적인 이현상의 최후는 이렇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이 발견되기까지의 세부 과정은 불분명한 의문 투성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