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현상 (문단 편집) === 광복 후 정국 === [[파일:영상실록이현상.jpg]]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회의에 참석한 이현상의 모습. [[8.15 광복]] 후 본래 ML파였던 이현상은 장안파 공산당을 만들었으나 곧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재건파에 합류한다.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어 당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 '''중앙위원''' ||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1905)|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1889)|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김무정|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1906)|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1902)|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 || '''중앙검열위원''' ||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 본래 [[이관술]]이 조직부장이라는 직책에 추천되었으나 이관술이 사양했다. 그래서 김삼룡, 김형선과 함께 이현상이 조직을 맡게 되었다. 저 조직국 자리가 권력을 쥘 수 있는 실세인 자리라고 한다. 대신 반대파와 충돌할 일이 많은 것인지 이현상도 조용한 성격인 것 같지만 반대파와 싸우게 된다. 이현상은 조선공산당 내 반대파에게 "소위 국제노선설을 날조하여 조선공산당을 마치 자기의 사유 같이 주장하는 동지 이현상"이라 불렸다. 김삼룡의 경우 "영등포 지구의 참담한 분열도 주저하지 않는 동지 김삼룡". 이주하의 경우 "원산 운동 혼란의 책임자". 박헌영의 정적이었던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회고록에 따르면 이현상은 사회주의 운동 최고원로인 김철수가 박헌영을 만나려는 것도 가로막고 할 얘기는 자신에게 하라고 했다는데, 이처럼 이현상은 반박헌영파와 갈등했다. 이현상과 김삼룡은 반박헌영파가 협상하러 오면 노려보는 등으로 반박헌영파들이 박헌영에게 얼씬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 출처: 안재성의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반박헌영파들은 '콤그룹 4인방'이라며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을 들었는데, 이미 경성콤그룹이 해산한 뒤 저렇게 불렸다는 건 별로 안 좋은 거다. 저 네 명이 반대파에게 욕 많이 먹었단 뜻. 잘 보면 이주하는 경성콤그룹 간부가 아닌데 '콤그룹 4인방'에 있고 이관술은 경성콤그룹 첫 지도자인데 없다. '콤그룹'이 진짜 독립운동 단체 경성콤그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투철한 박헌영파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현상 평전>에서는 김삼룡 이주하가 반박헌영파의 제명 요구를 받을 때 이현상이 제명 요구를 안 받은 걸 가지고 '원칙에 어긋나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하며 띄워주지만 실제로는 이 이후 3당 합당 시기에는 김철수, 강진, 서중석, 이정윤, 김근, 문갑송(이들은 대회파라 불린다)이 종파적인 당원이라며 김삼룡 이주하와 함께 이현상을 3당 합당준비위원회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박헌영은 대회파의 이현상 배제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대회파를 조선공산당에서 제명한다. 한편 정적이 아니었던 [[박갑동]]의 이현상 평은 다음과 같다. 안재성의 실화 기반 소설 속 박갑동의 말인데, 이 부분은 녹음 뒤 그대로 쓴 것 같다.[[https://dongosong.net/archives/1305|해당 안재성의 실화 기반 박갑동 소설]] >이현상 씨라면 일제치하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3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분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대단한 항일운동가라고 칭찬할 때면 “이현상만큼 옥살이를 많이 한 사람이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나중에 지리산에 들어가 5년간이나 빨치산 투쟁을 한 사람 아닙니까? 이력만으로 보면 쥐어짜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실제 이현상 씨는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참으로 너그럽고 온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부당원이나 간부들에게 하는 걸 보면 조선시대 선비가 따로 없어요. 뭣보다 인상 깊은 건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도 꼭 존댓말을 써준다는 겁니다. 항상 점잖은 존댓말로 조용히 말했지요. 생기기도 참 잘 생겼어요. 사내답게 넓고 큰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이 어찌나 빛나는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겁날 정도였지요. (중략) 선비 같은 분인데 빨치산 책임자가 된 거지요. 이현상의 성격은 일단 과묵했다고 한다. 과묵하고 강직한 대중적 이미지는 일단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지와는 달리 이현상은 의외로 엉엉 울었다는 목격담도 많다. 그래서 이런 증언에 따라 안재성도 이현상 평전에서 이현상이 우는 장면을 많이 넣었는데 빨치산들이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나의 이현상은 그러지 않아]]' 하면서 항의해서 뺐다고. 이현상 우는 부분은 원래의 2/5 정도만 남겼다고 한다. 이현상에 대한 이상한 환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1946년 12월, [[남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된 이후 남로당 중앙위원, 연락부장 겸 간부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과 함께 월북했다. 외세 [[소련]]과 [[김일성]]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공산주의의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남조선로동당]]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리승엽]]과 [[박헌영]]이 어느정도는 김일성과 타협점을 찾았던 반면 이현상은 그것을 외압에 인한 굴복으로 간주했다. 북한에서 이현상은 본래 모스크바 유학을 가려고 러시아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지냈으나, 북한에서도 남한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파벌싸움을 하며 김일성파와 치고박고 싸우다 모스크바 유학이 취소되고 남한으로 쫓겨난다. 한편 북한은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하고 남로당계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남파시키는 등 조직적인 남한 내 [[빨치산]]의 구축을 담당하나 이현상이 이끄는 병력을 제외하고는 조기에 격파되거나 와해되었다. 1949년,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출범하자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조직위원회 위원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