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현상 (문단 편집) === 일제 강점기 === 1905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금산군]][*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편입된 건 같은 가문인 [[해평 길씨]] 집성촌이 있는 금산군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길재호]](길재호 본인은 [[영변군]] 출신의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이다)의 입김으로 인해 충청남도로 편입된 1963년의 일이다.] 북일면 외부리(현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의 부농가에서 3백석꾼인 이면배(李勉培)의 4남 2녀 중 다섯째,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http://db.history.go.kr/id/ia_4428_3436|#]] 아버지 이면배는 일제강점기 초에 군북면장 및 [[http://db.history.go.kr/id/gb_1913_03_25_a01920_0120|금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지냈는데 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비가 지금도 금산 - 대전 간 도로변에 서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맏형 이현기(李鉉冀)와 둘째 형 이현석(李鉉奭)도 각각 1925년부터 1926년까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군북면장 일을 보았다.[* 셋째 형은 [[6.25 전쟁]] 뒤 행방불명되었다.]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등학교|고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중퇴한 뒤 [[중앙고등학교|경성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5년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에는 학생 신분으로 주동자 역할을 하며 유인물을 배포하다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6개월 간 복역하다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듬해인 1927년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에 들어간 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산하의 학생부 위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야체이카회, 독서회 등에서 상무 위원ㆍ상무 집행 위원ㆍ책임 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1928년 보성전문학교에서 반일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일제의 대대적인 공산당 검거에 걸려 구속됐다. 이것이 세칭 ‘ㄱ당 학생 사건’이었다. 당시의 일본 경찰 신문 조서를 보면 이현상은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한인 청년회에 입회, ‘사회주의 선전에 전력’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피의자 소행 조서'에서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하다고 기재돼 있고 '''극력한 사회주의자로서 개전의 가능성은 없음'''이라고도 적혀 있다. 또 신문사 조사에 따르면 이때 그는 [[경성부]] [[익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에서 아내와 슬하 1남 1녀, 하인 한 사람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생활비와 학비는 형이 대주고 있었다고 한다. 1928년 검찰에 의해 다시 한 번 소위 [[치안유지법]]ㆍ보안법ㆍ출판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ML당 사건까지 겹쳐 징역 4년을 살게 되었다. 1930년 4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1932년 감옥에서 나온 후로도 공산주의 활동을 멈추지 않아 체포되고 투옥되기를 거듭하였다. 그가 일제하 감옥에서 생활한 기간만 12년여였다. 1933년 그는 [[경기도]] [[경성부]] 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에 [[http://db.history.go.kr/id/had_157_0270|거주하면서]]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최소복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 최상부 지도부가 되었으며, 경성 트로이카 조직은 경성부 지역에서 공장 파업을 조종하고 동맹휴학을 일으키며 활동하던 중 이효정, 이경선과 박진홍 등의 여성 사회주의자들과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체포 당시에는 [[경성부]] 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ad_193_0030|#]]] 당시 이현상도 붙잡혀 일년 여에 걸친 재판 끝에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1938년에 출옥했다. 그런데 의지가 강고하다는 평을 보면 고문을 잘 버텼겠지만 1기 경성트로이카 때 이재유가 체포된 계기가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이현상 체포 때문이다. 1939년에는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이 결성한 [[경성 콤그룹]]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하였다. 이현상은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박헌영]]을 [[경성콤그룹]]에 영입할 것을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에게 건의하였고 이관술은 이현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헌영을 영입한다. 그는 이 시기에 집에서 돈을 끌어다 공산주의 운동 자금으로 썼다.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에서는 이현상을 띄워주려고 이현상이 경성콤그룹을 창설했고 박헌영 영입 전 최고지도자였던 것처럼 써놨는데 실제로는 이관술이 창설했고 이관술이 최고지도자였다. 안재성 평전의 소설같은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관술이 김삼룡, 이현상보다 높은 지위라 고문도 이관술이 김삼룡, 이현상보다 몇 배 심하게 당했는데 공로를 뺏기는 이관술이 불쌍하다. 그러다 1941년 조직이 발각되어 검거되었다가, 미결 기간 중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그 즈음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발악이 심해지고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ㆍ전향이 속출하자 출옥 후에는 일제의 수사망을 피해 [[덕유산]]으로 도피, 은거했다. 이 당시의 은거 생활은 이후 이현상의 행적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이현상은 대전에서 공산주의자협의회와 연락하며 지하활동했는데, 역시 병보석 받고 경찰로부터 탈출한 [[이관술]]도 대전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했기에 이관술과 함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현상이 일제강점기에도 빨치산이었다는 소문은 거짓이다. 이현상이 몸담은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가 빨치산하는 부서가 아니라, 연대할 만한 민족주의자를 물색하는 부서이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