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현상 (문단 편집) === 유족 === 어머니 원주 김씨는 “우리 현상이 죽지 않았다.”며 아들을 기다리다 지난 1975년 90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고, 일부 조카들만이 서울과 전주 등지에서 살고 있다. 부인 경주 최씨와의 사이에 1남 3녀가 있는데 [[6.25 전쟁]] 전후로 모두 월북했다. 외아들 이극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정년 퇴직 후에 인민대학습당의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일했다. 맏딸 무영은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에서 일했다. 둘째 딸 문영은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막내딸 이상진은 북한에서 여성 최초로 일등서기관이 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 평양의 만수대의사당 부총장으로서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이상진[* [[1941년]]생]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의 동급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김일성이 이상진은 특별히 배려하여 대학 졸업하자마자 외교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고, 남편을 따라 외국에도 보내주었다. 이무영과 이문영 중 한명은 호위사령관 [[전문섭]]의 동생 전문철과 결혼시켜주었지만 1970년대 초반에 자식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일방적 이혼당했다. 이걸 안 김일성이 내 딸이나 마찬가지인데 애 못낳는다고 차버렸냐고 노발대발해서 즉시 전문철을 철직해버리고 전문섭까지 불러서 동생 교육 어떻게 시켰냐고 쪼인트를 까버렸다고 한다. 김정일도 동창인 이상진의 언니가 그따위 대접을 받았단 사실에 열받아서 난리치고 이상진의 언니에겐 외교관 자리를 배정해주고 귀임한 후에는 문화인아파트의 가장 큰 아파트를 하사했다고 한다. 전문철은 지방에서 5년간 구르다가 1977년에 복권되어 주 쿠바 북한 대사관 책임비서로 나갔다. 그나마 원하던 아이는 얻었다고. 이현상 부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리산에서 내려와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하수복이라는 간호사가 합류 했었다. 그녀는 3년간 남부군 사령부 의무요원으로 있었다. 대략 53년초 남부군이 수십명 밖에 안남고 지리멸멸한 단계때 둘은 본격적으로 가까워 졌고 육체 관계까지 맺었다. 그녀는 당시 이현상의 딸뻘 나이인 23세였다. 하수복은 1953년 여름께 산에서 내려와 수용소에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 이어 바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 아들이 이현상의 자식이며 현재 [[부산]] 지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수복과 아들은 자신들과 이현상과의 관계를 극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1989년 초 그동안 청주보안감호소에 줄곧 수감돼 있다가 76세의 나이로 병사한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삼홍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찾아온 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