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해경 (문단 편집) == 생애 == 3세 때 생모와 헤어져 [[사동궁]]에서 [[의친왕비]]의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36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계동궁]] [[이기용(1889)|이기용]]의 양녀로 입적했다. [[경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49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이화여자대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1953년에 졸업했다. 대학 시절 야간학반을 다니며[[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B4%EA%B2%BD_(1930%EB%85%84)|#]]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약 보름간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612100047|#]] [[6.25 전쟁]] 때에는 주한미8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했다.[[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11.php|#]] 휴전 후 1954년에 [[의친왕비]]의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했다. [[6.25 전쟁]] 중 서울이 수복된 뒤로 궁밖에서 생모와 살게 되었다. 이해경을 친딸처럼 여기던 의친왕비가 다시 같이 살자고 여러 번 권했고,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생모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바깥세상을 접한 뒤로 궁 생활을 갑갑하게 느끼게 되어 계속 궁 밖에서 살았다. 가끔 궁으로 문안인사를 가면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잘 안 보이는 증상을 겪기까지 했다고 하니, 자유로운 바깥 생활을 한 뒤로 궁 생활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꼈는지 알 수 있다. [[의친왕]]이 별세한 다음해인 195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때 미8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할 때 안면을 텄던 [[미군]] 병사 데이비드 스트리트 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612100047|#]][[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hds&wr_id=112&page=0&page=0|#]] [[텍사스 주]]에 있는 메리 하딘 베일러 여자 대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3년 뒤에 음악학 [[석사]] 학위를 취득, 졸업했다.[[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11.php|#]]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맨해튼]] 음악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허가를 받았음에도 진학을 못했다. 그래서 백화점과 보육원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hds&wr_id=112&page=0&page=0|#]] 그 무렵,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린든 존슨]]이 [[외국인]]이라도 미국 대학을 졸업하면 [[미국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법을 만들었고 이 때 영주권을 취득했다. 1969년에 [[컬럼비아 대학교]] 동양학 도서관에 새로 생긴 한국학 부서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서]]로 취직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1973년에 [[성악가]]로써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졌고, 1985년에는 [[테너]] 이인선 추모음악회가 열리자 한국에 와서 공연했다. 1996년 6월에 도서관 과장으로 정년 퇴직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5591657|#]] 사서로 일하던 시절에 [[한국사|한국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아버지 의친왕의 [[한국독립운동|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많이 발굴했고 은퇴 이후 본격적으로 의친왕의 명예회복 운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덕에 의친왕의 항일독립운동은 빛을 볼 수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판기념회.png|width=100%]]}}} || || {{{#fff '''1997년 6월 27일에 종묘에서 열린 《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판기념회.[br]①이혜원 ②이일주 ③이석 ④이원 ⑤이해경 ⑥이구 ⑦이해원 ⑧이해춘 ⑨이석주 [[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11.php|출처]]'''}}} || 퇴직한 그 해 11월에는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묘를 [[홍유릉]] 근처에 합장해 모셨고, 이듬해 6월에는 [[사동궁]]의 역사를 담은 수기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펴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KVkr3WO_JM)]}}} || || {{{#fff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환수한 2012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이다.]에 공사관을 방문한 이해경'''}}} ||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운동을 비롯해 혜문스님과 함께 [[도쿄국립박물관]]에 조선 왕실 투구와 갑옷을 환수하라는 서한을 보내는 등 잃어버린 문화유산 찾기 운동에 참여했고[[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5005518?sid=104|#]] 2017년 7월에는 자서전 겸 황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마지막 황실의 추억》을 펴냈다.[* 이해경 본인의 이야기가 많이 담기긴 했지만, 《나의 아버지 의친왕》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 당시 87세였던 이해경이 얼마 안 남은 삶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 희귀본이 되는 등 의친왕에 대한 자료가 워낙 적은 탓에 다시 책을 낸 것이라고.] 같은 해 10월에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종 즉위 재현 행사〉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서 개최한 황실복식전시 행사 〈대한제국, 복식에 깃든 위엄〉에 참석해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의친왕비가 물려준 황실 의복과 장식품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했다.[[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11.php|#]] 이밖에도 [[언론]]과 [[인터뷰]]를 많이 하고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고문을 역임하는 등 황실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1년부터 지금까지 [[뉴욕]]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는 강연 및 한인노인합창지도 등 한인사회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11.php|#]][[https://youtu.be/nqUboi-p2Fg|2022년 YTN 인터뷰]][* 92세의 나이에도 매우 정정한 모습으로 인터뷰하면서 네티즌들이 또다시 놀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더 흠좀무한건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는데 윤대통령 아버지인 [[윤기중]] 명예교수와 같은 연배다. 참고로 이해경이 윤기중보다 연상이고 사촌동생인 이구가 동갑내기인 윤기중과 [[연세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