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특(성한) (문단 편집) === 패배 후 죽음 === 303년 1월, 서진의 토벌군들을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이특은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비수(郫水)를 건너 다시 성도 공략을 시작했다. 성도성 내의 소성(小城)을 지키던 촉군태수 서검이 성을 들어 항복하자, 이특은 입성하여 약탈을 엄금하고 연호를 건초(建初)로 개원했다. 이류가 서안(西岸)에 주둔하니, 태성(太城)에 있던 나상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화의의 뜻을 비쳤다. 이에 완전히 승리한 것이라 판단한 이특은 서서히 방심하기 시작했다. 동생 이류가 항복해온 성도의 백성들을 경계하라 조언했으나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익주종사 임명(任明)이 나상에게 말하였다. > "이특은 본래 흉악한 반역자라 군사를 풀어 각 마을을 침략하고 성도의 백성을 해쳤던 전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교만하고 태만하여 아무런 방비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은 하늘이 그를 멸망시키려 함이 틀림없습니다. 성도 각 마을에 거사 날짜를 통보하고 안팎으로 이특을 협공하면 그를 무찌를 수 있을 겁니다." 나상은 그의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임명과 임예(任睿)를 이특 진영에 거짓 투항시켰다. 이때 마침 서진의 형주자사 종대(宗岱)와 건평태수 손부(孫阜)가 30,000 군사로 익주를 구원하러 오고 있어, 이특은 이탕, 이황(李璜), 임장(任臧) 보내 막게 했다. 임명은 이특의 신뢰를 얻은 후, 이탕의 군사가 빠져나가는 날짜를 나상에게 밀서로 알려, 그날을 기일로 잡았다. 나상은 성도 각 마을에 사람을 파견해 2월 10일, 약속된 날에 다함께 일어나 이특을 치자는 협의를 하고 때를 기다렸다. 2월 10일, 나상이 군사를 일으켜 이특을 기습했다. 성도의 여러 마을들도 나상에게 호응하여 성도에 들어온 이특의 군영을 급습했고, 임명, 임예까지 군영 내부에서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특은 군사를 지휘하며 이틀 밤낮으로 성도성 내에서 혈전을 벌였지만 군사가 적어 이내 패배했다. 이특은 잠시 신번(新繁)으로 물러나 패잔병을 수습하고, 다시 성도를 쳤으나 나상에게 또 패하여 사로잡혔다. 나상은 사로잡은 이특, 이보, 이원을 모두 참수해 그 수급을 낙양에 보내고 그들의 시체는 불태웠다. 종대와 싸우던 이탕은 후방이 위험한 채로 계속 싸울 수 없었기에, 적조로 퇴각해 그곳을 지켰다. 유민들은 매우 놀라 두려워했으며 그의 지도자 자리는 동생 [[이류]]가 계승했다. 후에 [[304년]] [[성한]]이 건국되고 아들 [[이웅(성한)|이웅]]이 그를 [[시조]](始祖) 경황제(景皇帝)로 추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