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특(성한) (문단 편집) === 봉기 === 10월에 이특과 이류는 무리를 이끌고 적조(赤祖)에 주둔하고, 막사를 2개로 나누어 이특은 북영에, 이류는 동영에 머물렀다. 신염과 이필은 상관 나상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광한도위 증원(曾元), 아문 장현(張顯), 유병(劉幷) 등에게 30,000 보기를 주어 이특의 북영을 기습하게 했다. 나상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독호 전좌(田佐)를 보내 증원 등을 돕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습을 예견하고 매복해 있던 이특은 증원의 병력 절반 이상이 북영에 진입했을 때, 복병을 일으켜 맹공을 가했다. 오히려 역으로 기습당한 서진군은 대파당했고, 증원, 전좌, 장현은 이특에게 참수되어 그 수급이 나상에게로 보내졌다. 나상은 부하 장수들에게 탄식했다. > "광한태수 신염이 내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특이 형세를 타고 새처럼 날아가버렸구나. 이특의 기세는 나날이 높아만 갈 텐데 이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가?" 한편, 관군을 크게 무찌른 6군의 유민들은 일제히 이특을 행진북대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특은 이류를 동독호, 행진동대장군, 형 이보를 표기장군, 이양을 효기장군으로 각각 임명한 뒤, 광한태수 신염이 지키는 광한을 쳤다. 나상이 이필과 비원을 보내 신염을 구원하니, 신염은 성 밖으로 뛰쳐나가 이특과 싸웠다가 패배하고 덕양(德陽)으로 달아나 형주자사 유홍(劉弘)에게 귀부했다. 이특은 광한을 점거하고 이초(李超)를 광한태수로 삼았다. 302년, 이특이 군대를 이끌고 나상이 있는 성도를 향해 진격했다. 나상은 평소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격 탓에 백성들이 싫어하였는데, 이특이 약법3장을 발표하고 노역 면제, 백성 구휼 등의 정책을 펼쳐 백성들이 항복해왔다. 나상이 이특의 심복 중 하나인 염식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염식은 그에게 간사한 말만 믿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며 꾸짖는 답장을 보냈다. 이후로도 나상은 이특과 수 차례 싸웠지만 전패하여 성을 에워싸 방비를 강화하고 양(梁)과 녕(寧) 두 주에 구원을 요청했다. 나상을 위기에 몰아넣은 이특은 대도독, 진북대장군을 자칭하였다. 이특의 장남 이시(李始)는 무위장군, 차남 이탕(李蕩)은 진동장군, 막내 [[이웅]]은 전장군, 이함은 서이교위로 임명되고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관직을 받았다. 하간왕 [[사마옹]]의 명을 받고 이특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아박(衙博)이 재동에 주둔했다. 남이교위 이의(李毅)도 군사 5,000명을 보내 나상을 지원했고, 서진 조정에서 새로 임명한 광한태수 장정은 덕양, 독호 장구(張龜)는 번성에 각기 주둔해 성도를 포위 중인 이특을 압박했다. 이에 이특은 하는 수 없이 성도의 포위를 잠시 푼 뒤, 이탕, 이웅을 보내 아박을 쳤고, 자신은 직접 번성으로 가 장구를 공격했다. 이탕과 이웅은 양면(陽沔)에서 아박의 군대를 궤멸시킨 뒤 재동을 점령했고, 이특 또한 장구를 패퇴시켰다. 연이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자 이특은 익주목, 대장군, 대도독, 양익2주제군사를 자칭했다. 8월, 이특이 아들 이탕과 함께 덕양의 장정을 쳤다. 장정은 험난한 지세의 의지하여 이특과 여러 날 동안 싸우니 결판이 나지 않았다. 당시 이특과 이탕은 군영을 2개로 나눠 주둔하고 있었는데, 장정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우회하여 이특의 진영을 기습하자 이특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이특의 사마 나준(羅准)과 임도(任道)가 철수를 권했으나, 이특은 이탕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라 믿고 듣지 않았다. 과연 이탕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좁고 험난한 산길을 넘어 겨우 이특의 진영까지 도착했고, 부자가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장정의 군대를 패주시킬 수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이특은 부현(涪縣)으로 돌아가 쉬고자 했지만, 이탕의 사마 왕행(王幸)의 간언을 듣고 계속 장정을 공격해 덕양마저 함락시켰다. 대패한 장정은 이특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다 수륙 양로로 뒤쫓아온 이탕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특은 장정의 시체를 그의 아들 장존(張存)에게 돌려주는 은혜를 베풀고 장수 건석(騫碩)을 덕양태수로 임명하였다. 이특이 서진의 관군을 토벌하고 있을 때, 이양, 이반(李攀), 임회(任回), 이공(李恭) 등은 비교(毘橋)에 주둔하며 나상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상이 수 차례 비교로 군사를 보내 공격해왔지만 이양 등이 이를 모두 무찔렀다. 이특이 덕양을 평정하고 이류가 성도에 도착해 성 북쪽 주둔하자, 나상은 급박해져 부하 장흥(張興)을 이양 군영으로 보내 거짓 항복시켜 그 허실을 살피게 하였다. 장흥은 이양의 군대가 2,000명도 안된다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나상은 그날 밤에 야습할 계획을 꾸몄다. 이윽고 밤이 되자 나상은 10,0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양의 진영을 야습했다. 이양의 군대는 패하여 이반은 전사하고, 이양, 이공, 임회 등은 도망쳐 이류와 합류했다. 이류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하여 승리에 취해 있는 나상의 군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류의 맹공에 나상은 병력의 8~9할을 잃은 채 성도로 황급히 들어갔다. 때마침 이특이 서진의 양주자사 허웅의 토벌군까지 대파하니, 이특 세력의 위명은 더욱 빛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