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태영 (문단 편집) == 일생 == 2살 때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와 두 오빠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한다. 결혼 후 남편의 응원으로 1946년, [[30대]] 시절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다. 하지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야당 의원 [[정일형]]의 아내라는 것을 트집 잡아 [[판사]] 임용을 거부하자 1954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1958년에는 김흥한, 장대영 변호사와 함께 국내 최초의 로펌인 김장리 법률사무소를 설립했으며, 김장리는 법무법인 양헌(영문명 김장리)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가, 다시 법무법인 김장리로 변경되어 운영 중이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야당 [[국회의원]]의 아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소박맞은 아내, [[첩]], 시국사범들이 그녀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게 되었다. 이태영은 이들을 변호하면서 법률이 남성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운동에 앞장서며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한다. 1996년에 [[당선]]을 장담했던 아들 [[정대철]]이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자 정신적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그에 따른 악영향으로 [[노환]]까지 겹쳤는지는 몰라도 [[치매]]에 걸려 2년간 가족도 못 알아보고 지내다가 [[1998년]] [[12월 17일]]에 별세했다. 향년 84세. [[장면]], 남편 정일형과 함께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정일형이 김대중과 같은 계보에서 활동한 인연도 있었겠지만,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폐인처럼 지내던 김대중에게 자신의 후배이자 비서 [[이희호]]와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도 바로 이태영. 1998년 사망 후,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다. 사실 단독안장 자격도 충분히 되었으나 본인의 유언인 듯 하다. [[파일:external/www.google.co.kr/lee-tai-youngs-101st-birthday-4758285655736320.2-hp.jpg]] 2015년 8월 10일에 올라온 탄생 101주년 기념 [[구글 두들]]. 좌측에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법 개정을 위해 애쓴 법조활동을, 우측 상단에는 저술 및 학문활동을, 우측 하단에는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여성 및 가정문제 관련 상담활동을 하던 장면을 담았다. 여담으로, 생전에는 아직 여성 [[변호사]]가 증가하기 이전 시기라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들이 [[사법연수원]] 입소 전후로 단체로 인사드리는 일이 잦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